기독교강요

(존 칼뱅 지음, 김종흡, 신복윤, 이종성, 한철하 공역, 생명의 말씀사, 1986) 

 


1. 저자 소개

칼뱅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의 노용에서 출생했다. 유아세례를 받은 그는 12세경에는 사제를 도와서 교회의 제단을 섬겼다. 칼뱅의 부친은 칼뱅이 사제가 되기를 원했지만, 칼뱅은 마르쉬 문과대학에서 문과 계통의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19세 때에 칼뱅은 신학연구를 위해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토론기술을 배웠으며, 후기중세기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의 신학에도 접하였고, 롬발트의 조직신학도 배웠다. 1528년에 칼뱅은 부친의 권유에 따라 올레앙 대학으로 가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 후 2년 동안 칼뱅은 부르쥬 대학에서도 인문주의를 접하게 되었으며, 희랍어와 개신교 신학을 배웠다. 칼뱅은 아마도 1529년에서 1532년 사이에 회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칼뱅의 친구 에티언느가 화형을 당하자, 칼뱅은 1535년 스위스 바젤로 피난하였다. 1536년에 칼뱅은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했다. 1538년 9월에 칼뱅은 슈트라스부르크에서 피난민들을 돕는 목회를 했고, 1540년에 결혼했다. 칼뱅은 슈트라스부르크에 체재하는 동안에 1539년에 『기독교강요』를 다시 썼다. 1539년판은 1536년판의 3배나 된다. 1541년에는 1539년판을 불어로 번역하여, 폭넓게 보급하였다.

제네바 시의회는 제네바시가 정치적으로 교회적으로 혼란이 계속되자 칼뱅을 다시 불렀다. 제네바 종교개혁에서 칼뱅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강조했다. 1559년에 칼뱅은 『기독교강요』의 최종판을 출판했다. 1564년 5월에 칼뱅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에 따라 묘비는 세워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사후에 자신보다는 오직 하나님만이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2. 저술 배경

칼뱅은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보내는 헌시”에서 『기독교강요』의 저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의도는 다만 몇 가지 기초적인 원리를 기술하여, 종교에 열심 있는 사람들이 참된 경건이 생활을 이루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특별히 나의 동포 프랑스 사람들을 위하여 저술하였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주리고 목마른 듯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있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적은 지식마저도 바로 터득한 자가 매우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뭇을 들게 된 의도라는 것은 이 책 자체가 증명하는 것처럼 그 내용이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악한 자들이 광포가 극도에 달하여 폐하의 나라에서 건전한 교리가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이 책으로 저들을 가르치고 나의 신앙고백을 폐하께 보여 드릴 수 있다면, 이것으로 나는 보람 있는 일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上 41) 

여기서 『기독교강요』의 저술 목적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가능한 한 단순하면서도 조직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교를 탐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이해시키려는 실제적인 목적이다. 둘째는 변호의 목적이다. 1535년 초에 프랑스에 박해가 일어났을 때, 칼뱅은 이 책을 통해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변호하려고 했다.(上 31-32) 

 

3. 줄거리

『기독교 강요』 최종판(1559년)은 모두 4부 8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 1장-5장은 “하나님 인식”에 관해, 6장-15장은 “성경”에 관해, 15장은 “인간”에 관해, 그리고 16장-18장은 “섭리”에 관해 말한다. 제2부 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 : 1장-6장은 “인간의 타락”에 관해, 7장-8장은 “율법”에 관해, 그리고 9장-17장은 “그리스도”에 관해 말한다. 제3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 1장-제20장은 “믿음”과 “중생”과 “회개”와 “보속”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칭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기도”에 관해 말한다. 그리고 21장-24장은 “영원한 선택”에 관해, 25장은 “최후의 부활”에 관해 말한다. 제4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 : 1장-12장은 “교회”, “로마 교황권”, “교회의 재판권”, “권징”에 관해, 13장은 “맹세”에 관해, 14장-19장은 “성례”에 관해, 그리고 마지막 20장은 “국가 통치”에 관해 말한다.   



4. 평가

칼뱅의 『기독교강요』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 견줄 만한 위대한 신학적 대작이요, 명작이요, 걸작이다. 그러나 『기독교강요』는 교회와 신학의 역사에서 다른 두 책보다 더 막강한 영향을 떨쳤고, 지금도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칼뱅은 위대한 종교개혁자로서, 그리고 사회개혁자로서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이 위대한 명저를 통해 종교개혁 신학과 폭넓은 개신교 신학의 확고한 초석을 놓았다는 점에서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독보적인 의미와 명예를 누리고 있다. 지금도 그의 신학을 따르는 제자들이 지구 곳곳에서 얼마나 많으며, 그의 정신 위에 세워진 교회와 단체가 얼마나 많은가?

비록 그의 신학적 수업 기간은 비교적 짧았지만, 그의 치밀한 성서 주석과 교리적 분석, 탁월한 저술 능력은 다가온 세대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었고, 수많은 제자들과 학자들에게 놀라운 영감과 지혜를 주고 있다. 오늘날에도 특히 수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여전히 그의 찬란한 후광 속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가 남긴 족적을 따라가며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열중하고 있다. 많은 신학들 가운데서 특히 칼 바르트는 칼뱅을 떼어놓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비록 바르트는 여러 점에서 칼뱅을 비판하지만, 바르트에게 끼친 칼뱅의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앞으로도, 아니 어쩌면 이 땅에 교회가 존속하는 한, 『기독교강요』의 영향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다고 했던가!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강요』가 던진 어두운 그림자와 부정적인 영향도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칼뱅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기를 원했고, 그래서 자신의 무덤도 매우 초라하게 만들기를 원할 정도로 매우 겸손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후예들은 그의 유언과는 정반대로 그를 종종 바울과 예수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앉히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많은 제자들이 오늘날도 그의 신학을 전혀 오류가 없는 절대적인 진리로 올려놓고, 이를 근거로 다른 신학과 신학자들을 마구 비판하고 매도하고 있으며, “칼뱅주의, 개혁주의” 등의 구호 아래 신앙의 형제들을 공격하고 교회와 교파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어리석음을 저질러 왔다.

이런 불행한 책임은 물론 칼뱅이 아니라 그의 빗나간 제자들의 탓으로 돌려야 하겠지만, 일정 부분은 지나치게 엄격하고 오만했던 칼뱅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는 실수와 오류가 없는 인간이 아니었거니와, 그의 신학도 지금 우리가 수용하기 어려운 시대적 제약과 한계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