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신학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신재구 옮김, IVP, 1997) 

 

성현철

 

보수와 진보를 누가 정했으며, 왜 그들은 서로 대화하지 않는가.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많다. 하지만 수많은 비판과 반성이 난무할 뿐 정작 대화의 현장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어렵사리 대화의 장에 참석을 한다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자신에 입장을 고수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기껏해야 ‘그래도 상대 진영을 존중해야 할 필요는 있다’는 류의 구실이나 명분이되거나, 한 발 더 양보하더라도 상대 진영을 논지를 자신의 진영의 입장에서 재해석되기 쉽상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입장이 좁혀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긴장이 더 깊고 넓어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구심이 든다. 누군가는 좀 더 보수적 성향이, 누군가는 좀 더 진보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진영논리는 이제 더이상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양진영에는 어쩌면 단순한 입장차이를 너머 무언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커다란 신념과 같은 것이 뿌리 깊게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1. 논쟁을 풀어나가는 해석학적 열쇠 : 초월성과 내재성.

신학논쟁도 마찬가지지만, 지금부터 소개하는 『20세기 신학』은 앞서 이야기한 보수와 진보의 문제를 단순한 입장차이로 나열하며 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수와 진보의 문제를 ‘초월’과 ‘내재’라는 제3의 해석학적 구도를 통해 살핌으로써 진영논리의 늪을 피해가면서도 그 이면에 숨겨진 중심주제가 무엇이었는지 심도 있게 분석하며 현대신학의 흐름을 짜임새 있게 풀어나가는데 성공한다. 저자는 주장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이 세상 너머에 계신 ‘초월자’이자 동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내재자’로서 제시한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각 시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묘사할 때 고충을 겪어야 했다.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이중적 진리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두 가지 모두를 인정하는 창조적 긴장과 균형의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만일 지나치게 ‘초월성’을 강조하면 우리가 사는 문화적 상황과의 관련성을 잃게 되고, 반대로 지나치게 ‘내재성’을 강조하면 어떤 특정 문화에만 얽매이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12)

따라서 저자는 ‘초월성과 내재성’라는 전체그림 속에서 현대신학의 흐름을 그 강조점의 기울기에 따라 적절히 배열하여 현대사상의 흐름을 설명해 나간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국내의 대부분의 현대신학 개론서가 상대진영을 지나치게 비판일변도로 진술하거나 필요에 따라 전체신학의 흐름을 선별하여 살펴보려는 경향이 있는 점에서 그것과 다른 차별점을 선사해준다. 오히려 본서는 20세기 전체 흐름을 빠짐없이 다루면서도 그 방향을 ‘진영대립’이 아니라 초월과 내재의 ‘강조점 차이’로 그 방향을 돌림으로서 갈등을 해결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득력있게 전달한다.

이를 테면, 계몽주의 이후 이성이 강조된 19세기 신학에 대한 서술을 “하나님이 자연과 이성에 너무 근접하다못해 급기야 이성의 질서정연한 세계 안으로 ‘신의 초월성’이 용해되어 버리기에 이르렀다”(30)고 기록하며, 내재성에 대한 반동, 즉 ‘신의 초월성’의 부활을 20세기 신학의 탄생으로 묘사했다. 즉, 칸트(도덕적 경험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헤겔(사변이성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슐라이어마허(종교적 감정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고전적 자유주의(윤리적 문화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를 ‘19세기 신학에서의 내재성 강조’라고 싸잡아 정리한 뒤, 20세기 신학은 바로 이러한 내재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상대적인으로 ‘초월성’을 강조하며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바르트를 하나님의 자유로서의 초월성, 불트만을 케리그마로서의 초월성, 본회퍼를 삶의 한복판에 계신 하나님의 초월성, 몰트만을 희망의 신학이 나타낸 미래로부터의 초월성으로 각기 강조하며 소개한다.)

또한 각 장의 소개방식에 일종의 ‘구성적 일관성’을 지니게 하여 초월성과 내재성의 구도 속에서 비평적 객관성을 유지하려 하였다. 각 장은 크게 3가지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먼저 도입부에서 각 신학사조가 나타나게 된 ‘전환기적 맥락’을 소개하고, 2)중반부에 그 신학사조가 강조하는 주요주장과 그러한 주장이 나타난 대표적 사상(교리)이나 서적의 내용과 의의를 설명한 뒤, 3)마지막 후반부에 이르러 그럼에도 그 신학사조가 받게 되는 비평적 한계가 무엇인지를 저술하는 방식으로 각장이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독자들로 하여금 각장을 필요에 따라 따로 떼어 보더라도 초월성에서 내재성으로, 내재성에서 초월성으로 흘러가는 앞 뒤 맥락의 흐름이 끊기지 않으면서도, 그 신학사조가 왜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는지를 보다 큰 그림의 연속선 안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본서의 세부내용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독자들은 그저 각 장의 고유한 내용에 따른 심층적인 논의와 평가와 대화하며 정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정돈해 나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 책을 덮으면서 발견한 해석을 한 두가지 덧붙이자면, 한 두가지로 정돈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2. 열린 결말로서의 새로운 발견 : 초월성과 내재성

첫째로, 이 책의 원서에 붙여진 <20 CENYURY THEOLOGY : God & the world in a Transitional Age> 부제에 대한 해석이다. ‘과도기에 있는 신과 세상’이란 부제는 이 책이 지니고 있는 결말이 닫힌 결말이 아닌 열린 대화로서의 기획되었음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번역서의 부제로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저자는 서문에서 20세기의 특징을 계몽주의 이후 발단된 현대문화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 끼어 있는 중간기, 즉 과도기적 시기로 본다. 저자는 20세기를 소위 “현대성”의 만발과 결실로 보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이제 부식과 퇴조하면서 나타난 다양한 현상들에 우리가 대응해야한다는 쪽을 택했다.

다시 말해 실존주의 이후 나타난 신 물리학, 여성주의, 해체주의등으로 나타나는 사조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 ‘우주에서 인간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에 대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강한 의혹을 품게 되었다’(9)고 지적한다. 즉 최근의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문제, 신학과 과학에 대화(충돌이 아닌 신비로서의 만남), 이성과 신앙이 양상구도 변화(경쟁관계의 구조가 아닌 연합으로 이뤄지는 융복합적 성향)등은 그 논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문제를 과학이나 철학이 묘사했던 체계적 폐쇄성이 아닌 새로운 희망이나 근원으로서 제시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20세기의 신학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바로 이러한 다가오는 시대의식, ‘신학’이 어떻게 ‘문화’와 씨름하면서도 기독교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는지에 대한 응답을 주목하며 살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암시하고 있다. 눈이 밝은 예민한 독자가 아니라면, 이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강조점을 놓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기획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쉽사리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저자에게 있어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신학비평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서 오늘날 새로운 시대에 맞서 균형과 돌파를 이뤄내며 응답해야하는 열린 요청이다. 그것이 이 책의 결말이라면 결말일 것이다.

둘째로, 초월성과 내재성의 구도가 시간과 공간의 구도로도 읽혀진다는 사실이다. 10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비록 1,2,3부처럼 대 제목으로 쪼개어 살펴보진 않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책은 3부로 현대신학의 흐름을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을 듯하다. 20세기 신학의 전초로서 19세기 신학을 다루고 있는 1장과 2장을 1부로, 20세기 신학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와 심도 깊은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3장-7장을 2부로, 20세기 신학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최근 흐름의 동향으로 제시된 8-10장이 3부로 그 구획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비록 그 제목이 『20세기 신학』이지만 다르게 접근해 볼때 20세기 신학을 전후로 19세기 신학인 1부와 20세기 신학인 2부, 그리고 21세기 신학으로 나가기 위한 대안모색인 3부로 기획된 책이라 할수있다.

그런데 1부에서 3부까지의 흐름 살피다보면 새롭게 발견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초월성과 내재성이란 강조점에 대한 기울기가 아니라 나타나는 방식에 따라 초월성과 내재성이 펼쳐지는 장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만일 1부의 19세기 방식이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이 ‘아래로부터’ 내재화되어버린 내재적 초월신학이었다면, 2부의 20세기 방식은 내재화된 초월이 분리가 되면서 하나님의 초월성이 ‘위로부터’ 뚫고 들어오는 초월적 내재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초월성 내재성이 어느 것 하나 간과됨 없이 첨예하게 강조되는 한계점에 이르게 된다. 이 때 나타난 것이 몰트만의 ‘미래’적 초월이라는 점은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초월성과 내재성의 구도가 위와 아래의 ‘공간적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의 정점에서 미래로부터 현재로의 재해석이라는 ‘시간적 차원’으로 해석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적전환은 초월성과 내재성의 논의가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 정합적 통일성을 일궈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3부에서 나타나는 ‘설화(이야기) 신학’은 급기야 ‘시공간적 차원’을 넘어 ‘이야기 자체 내에서의 초월’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월성과 내재성의 논의가 단순히 위로부터냐 아래로부터냐의 도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풍성함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결론 : 논쟁의 종식, 대화로서의 신학

앞서 필자는 ‘보수와 진보, 왜 그들은 서로 대화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적어도 신학에서 만큼은 『20세기 신학』의 저자가 기획적으로 시도한 ‘초월성과 내재성’의 구도와 균형에 대한 몸부림이 그러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몇몇 독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저자의 입장과 상관없이 필자는 흔히 대한민국에서 흔히 보수진영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진보진영이 강조하는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논지가 마치 위로부터의 ‘초월’이냐 아래로부터의 ‘내재’이냐의 강조점 구도에 따라 갈라지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러한 구분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만일 이러한 시선에 동의하며 『20세기 신학』의 기틀과 흐름을 살펴본다면 신학적 보수와 진보진영이 서로를 이해하는데 이만한 개론서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영 그자체가 아니라 진영이 고수하고자 했던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창조적 긴장, 곧 그리스도교의 유산이다. 오늘날의 신학은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해 있고, 창조적 응답을 고대하고 있다. 가톨릭이 제2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새로운 신학적 대화의 물꼬를 틀고, 아프리카와 남미의 오순절 신학과 해방신학이 서구 그리스도교의 사변적 논쟁에 맞서 현실적이고 체험적인 신학적 대화를 요청했듯이, 오늘날의 한국교회 역시 새로운 흐름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고 있는지에 대한 건설적인 토론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와 ‘아직’사이 이듯, 현대신학의 흐름은 언제나 과도기적 시대로 남아 시대적 응답을 고대하고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대화가, 하나님의 백성과 피조세계와의 화해가 요원할 뿐이다. 우리는 어쩌면 신학적 진영이 아닌 시대적 응답과 싸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