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중심 영성전통에는 하느님의 아이스러움에 대한 인식이 넘쳐난다.  ...하나님이 태어나야 하고, 인간 사회와 사회구조 속으로 자라 들어가도록 허용되어야 하며, 인류가 하느님을 낳고 양육할 책임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아이스러움을 받아들임의 더 진정한 의미다. 

육화는 또한 하느님이 태어나실 필요가 있고 아이이실 수 있음을 시사사하기 때문에도 충격이요 신비다. 하느님 가장 새로운 존재라고 에카르트는 말한다.

막데부륵 메티힐드는 "나 하느님은 네 소꿉동무란다!"라시는 하느님의 장난기와 아이스러움을 감축한다. 그리고 이것이 뜻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아이를 끌어내시리라는 것이다. "내가 메 안의 아니를 놀랍게 이끌어주마."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와 놀이를 하신다. "하느님은 혼을 비밀스런 곳으로 데려가신다. 혼을 데리고 하느님 혼자 몸은 아무것도 모르는 놀이를 하시려는 것이다.

모든 창조적 공간에서 그렇듯이, 하늘나라에서는 어린이라 빼어나게 모두를 이끌 것이다. 위대함은 어린이가 가진 것에서 발견될 것이다. 어떻게 어른이 유치하지 않고도 어린이처럼 될까? 놀이가 열쇠다.

그리고 예술은 놀이의 결과다. 19세기 시인 보들레르는 "예술가란 마음대로 동심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하여, 자신들 안에 있는 어린이를 잃어 버리는 어른은 하느님이 주시는 우주발생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리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강조할 수 있었다. 노먼 브라운도 "예술은 자연적 본능에 충실하고 따라서 동심에 충실한 삶의 방식"임을 설명한다.

(매튜 폭스, 황종렬 옮김, 창조영성의 길라잡이 원복, 245 이하)

(매튜 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