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기독교인가?

미군정기(1945-1948)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에 대한 연구

김남식(CESI 한국전도학 연구소)

 

초록

이 논문은 해방 후 미군정기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에 대한 연구이다.이 논문의 목적은 해방 후 미군정기 한국 교회가 기독교의 본질을 경험하고 실천해 왔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조그만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한경직 목사의 설교와 한경직 목사에 대한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이를 위해 첫째, 미군정기라는 상황과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을 조지 헌터(George Hunter)의 기독교 수용이론적 관점과 폴 히버트(Paul Hiebert)의 상황화 이론적 관점으로 해석하였다. 둘째, 한경직 목사의 상황화된 로마식 전도적 관점에서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을 다뤘다. 셋째, 한경직 목사의 상황화된 로마식 전도의 나비효과에 대해서 다뤘다.

연구 결과, 해방 후 미군정기라는 특수한 상황과 한경직 목사의 전도에 대한 인식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융합되면서 첫째,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 이후 전해진 로마식 전도의 DNA가 그의 설교와 전도 목회에서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다. 둘째, 폴 히버트의 상황화 이론에서 볼 때 혼합주의가 발생할 수 있는 요소들이 그대로 한경직 로마식 전도의 상황화에 드러났다. 셋째, 한경직 로마식 전도의 상황화의 나비효과로써, 서북청년회의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제주 4.3사건, 5.16쿠데타 등이 발생하여 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 원정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핵심어: 한경직 목사, 영락교회, 미군정기, 전도, 교회성장

 

1. 들어가는 말

한국 기독교는 성장을 거듭해 오다가 21세기에 이르러 루이스 람보(Lewis Rambo)가 말하는 세대 평가(retroversion)를 접하면서 침체를 이어오고 있다.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이나 공감하는 침체의 원인 중에 하나는 대형 교회의 사유화와 세속화, 세습으로 이어지는 현상이다. 또 하나의 원인으로 일부 기독교인들과 목사들이 모여서 정치 집단을 형성하여 국가 정치에 관여하려는 모습 일 것이다. 더군다나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된 국면에서 일부 기독교인들이 태극기와 미국의 성조기를 흔들며 시위를 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무엇보다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이하 한기총)는 그들과 함께함으로써 정치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구국 기도회를 열였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여 약 300명의 학생들이 진도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 이일로 광화문에서 유족들이 진상 규명을 외칠 때 ‘서북청년회’는 유족들을 종북매국 세력으로 규정했다. 서북청년회라는 명칭은 한경직 목사가 개척한 영락 교회의 청년회 모임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2017년 시대적 상황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왜 교회가 사유화, 세속화, 세습화되는가? 둘째, 기독교인이 정당을 만들어 정치에 왜 참여하려하는가? 셋째, 기독교 보수라 자청하는 한기총은 탄핵된 대통령 지지자들과 왜 함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가? 넷째, 서북청년회는 왜 세월호 유족들을 종북매국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했는가?이다. 이에 대한 답을 여기서 모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질문에 공통 분모를 차지하고 있는 한 가지 질문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바로 리차드 플래쳐(Richard Fletcher)가 그의 책 Barbarian Conversion에서 제기한 ‘누구를 위한 기독교인가?’이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한 배경에는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가 있다.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 이전의 상황에서 기독교는 ‘자기 부인과 자기 희생(막 8:34)’이 따르는 종교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국가 종교(religio)가 된 후 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국가 종교라는 개념은 개인의 믿음과는 관련이 없으며 국가 종교를 부인하는 것은 곧 제국의 안녕을 바라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개인의 신앙과 종교(priviate religions)는 국가 종교를 따를 때 보장 받을 수 있었다. 이는 국교화 이전과는 달리 기독교인이 되는 조건이 국가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하게 로마제국에 속한 선교사들의 사역에 있어서도 성서적 전도와는 상관없이 로마식 전도를 통해 제국 변방을 로마식 문화와 종교로 귀속 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독교는 로마제국을 위한 것이었다.

종교 개혁 이후 18세기 영국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는 형식주의로 빠져들었다. 이에 헨리 나잇(Henry Knight)은“형식주의에 빠져있던 앵글리칸 교회는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인정하면서 인간의 “종교적인” 행위를 강조하였다” 라고 말한다. 동시에 18세기 영국 국교회는 로마식 전도의 DNA 즉, “개종을 위한 복음의 단순화, 강요 및 군사적 행위와 문화적우월성, 형식적인전도행위”를 이어받아 런던으로 몰려드는 많은 시골 출신들의 영국인들이 높은 문맹률로 인해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영국 국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경우 부흥주의의 물결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에 하나는 찰스 피니(Charles Finney)로 집회 중의 결신과 회심을 그 목표로 삼았는데 그 대표적인 증거로 감정의 표출이었다. 따라서 감정의 표출을 보인 사람을 집회 후에 초대하여 결신하고 회심할 때까지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전략’으로 삼았다. 문제는 회심이라는 자체가 단순히 감정의 표출로만 정의되고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윌리암 바클레이(William Barclay)에 따르면, 진정한 회심은 ‘에피스트레페인(ἐπιστρέφειν)’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육신과 영이 함께 하나님께 돌아서서 그를 지속적으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신명기30:9-10;역대하33:3). 이는 단순히 외적인 감정표출로 회심을 규정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그의 책 Religious Affection에서 은혜로 말미암은 진정한 감정과 거짓된 감정을 다루었다. 따라서 19세기 부흥주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는 외적 증거 즉, 감정 표출과 강단으로 초대에 응하는 것, 심지어는 교회에 들어서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했는 점이다. 즉, 이 당시의 기독교는 부흥주의를 위한 것이었다.

미군정기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을 봄에 있어 위와 같은 흐름을 먼저 이야기 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해방 후 미군정기 상황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과 같다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허명섭은 그의 책『해방이후 한국 교회 재형성』에서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해방은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에 비견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는 각종 집회가 억압당했으나 해방으로 그러한 제약들이 사라졌으며, 강탈당했던 교회의 재산들도 되찾게 되었고, 정부 당국의 각종 지원도 받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둘째, 해방은 남한의 경우 기독교를 배경으로한 미군의 점령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는 흡사 로마시대에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외쳤던 것처럼 남한은 팍스 아메리카나(Pax Aemericana)로 인한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점령’이라는 개념이 깔려 있었다. 이에 대해 박보영은 “미군정의 주 된 관심사는 ‘남한의 혁명적 분위기를 통제해 반공체제를 건설하는 것’ 이었지 ‘남한민중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군정기의 구호정책은 미군의 남한점령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점령정책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미국의 점령에 대해 당시 사회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평가를 최재건은 “일반 시민들도 갑작스럽게 맞이한 해방은 미국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인식했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일제를 패망케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해방은 정치적인 자유와 독립을 넘어 영적인 자유와 해방으로 간주되었다”라고 말한다. 셋째, 해방 후 건국을 준비하던 이승만과 김구 모두 대한민국을 “하나님 나라”, 즉 기독교 국가로 세우려했다는 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와 상황을 다뤄야 하나 본 논문에서는 연구의 범위를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으로 국한시켜 다루고자 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한국 교회가 기독교의 본질을 경험하고 실천해 왔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조그만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첫째, 미군정기라는 상황과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을 조지 헌터(George Hunter)의 기독교 수용이론적 관점과 폴 히버트(Paul Hiebert)의 상황화 이론적 관점으로 해석할 것이다. 둘째, 상황화된 로마식 전도적 관점에서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을 다룰 것이다. 셋째, 상황화된 로마식 전도의 나비효과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2.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

미군정기 한경직 목사 패러다임을 가장 먼저 엿볼 수 있는 단서는 ‘벧아니 전도 교회’의 개척(1945.12.21 당시 27명)이다. 교회명 자체에 ‘전도’라는 용어를 넣으면서 목회 자체에 전도를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벧아니 전도 교회’는 개척 1년 후 1946년 10월 16일 인천 중구 송학동에 한병혁 목사를 파송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1년간 매월 5천환을 보조하였다. 같은 해 10월 길선주 목사 아들인 길진경 목사를 인천 송도에 파송하여 인천송도교회를 개척하였다. 벧아니 전도 교회의 청년실업인(신행도)들이 후원하다가 여전도회가 후원하였다. 한경직 목사의 생애 걸친 설교에서 ‘전도’라는 용어를 약 1,184번 나오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전도와 관련한 ‘구원’이라는 용어는 약 3배에 달하는 3,301번이 나온다. 이렇듯 한경직 목사의 목회에서 전도에 대한 방점을 둔 결과 ‘벧아니 전도 교회’의 성장세는 미군정기에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광수는 한국전쟁 이전 약 3000명의 교세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한경직 목사에게 있어서 전도란 무엇이었느냐가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전도에 대한 인식은 역사적으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도의 정의에 따라 전도의 동기와 방법론과 지향점이 달라진다.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기를 넘어 전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미군정기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군정기를 중심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각각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전도 인식에 영향을 주고 현재의 전도 인식이 미래의 전도 인식에 대한 방향을 설정해 주기 때문이다.

이에, 미군정기에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을 생성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었나를 조사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남한이 미군에 의해 ‘점령’ 당하기 전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 제2교회에서 약 2000명의 성도들을 데리고 목회를 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해방군’이라는 명목하에 북한에 들어오고 공산당이 득세하려 하자 한경직 목사는 1945년 9월 기독교사회 민주당을 구성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인다. 그러나 신의주 학생 시위 사건으로 인해 한경직 목사는 월남하게 된다. 일제 치하에서와 해방기에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치에 관여한 것으로 보아 일상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한경직 목사의 경우 정치에 참여하는 동기가 ‘반공’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해 박종현은 “이 사건 이후로 그는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반공과 기독교라는 두 요소의 함수를 명료하게 개념화할 수 있었다”라고 한경직 목사의 반공과 기독교 조합을 정리한다.. 윤정란은 또한 한경직의 반공사상이 강화되고 교회 개척의 동기가 되었을만한 평가를 아래과 같이 정리한다.

서북지역의 기독교 지도자 대부분이 공산당에 체포,구속되거나 죽임을 당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 월남한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은 피난민 교회, 특히 한경직의 영락교회를 거점으로 삼아 월남한 목사를 중심으로 강한 연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미군정기 ‘벧아니 전도 교회’의 성장을 주도한 외적 요인으로써는 두 가지가 나타난다. 첫째는 1946년 3월부터 1948년 남한 정부 수립 직전까지 급격히 월남 성도들이 증가하고 이중 서북 출신 지역이 71.5%를 차지 하였다. 이처럼 몰려드는 월남 성도들, 정확히는 서북지역 출신들의 월남인들에게 ‘벧아니 전도 교회’는 남한에 안착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다. 그 결과 1946년 말 통계에 따르면 장년 962명, 유년 476명, 총 1,438명이었고, 헌금 총액도 약 80만원으로 보고 되었다.

두번째 외적 요인은 필요를 채우는 보급에 있다. 이에 대해서 윤정란은 다음과 같이 보고 한다.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서북 출신의 월남한 기독교인들과 밀착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던 한경직은 영어 실력이 뛰어나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통역을 전담했으며,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동기 동창과의 학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선교사들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서북 출신의 월남 기독교인들은 북장로교 선교사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한경직 목사의 인맥과 그 영향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안종철은 다음과 같이 보고 한다.

해럴드 보켈(Harold Voelkel, 옥호열)과 프란시스 킨슬러(Francis Kinsler, 권세열)인데 둘 다 한경직이 미국에 있을 때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보켈은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를 돌면서 포로들에게 전도하는 일을, 킨슬러는 이북출신 목회자들을 지원하는 역할과 함께 군목제도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과의 교류는 한국전쟁과 전후의 교회의 복구사업에서 한경직이 한국교회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46년 이후로 지속적인 영락 교회(벧아니 전도 교회에서 개명)가 ‘숫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한경직 목사의 목회관이 그의 설교에서도 드러나 있다.

세계의 부자가 이 의무를 이행했던들 오늘의 포악한 공산주의 사상과 공산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오늘날의 모리배여! 이 진리를 압니까? 피난민을 위하여 돈을 쓰는 것은 의무입니다. 자선이 아닙니다. 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물론 우리도 다 같이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깊이 깊이 느끼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북한에서 오는 구급을 요하는 형제들을 어떻게 하든지 교회에서 구제해야 합니다

여기에 영락교회 성장의 내적인 요인으로 기독교 복음의 상황화라고 할 수 있다. 상황화라 함은 기독교의 내용이 문화의 형식에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지 헌터(George Hunter)는 기독교 수용에 있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형식을 말한다.

토착 종교 형식+ 토착종교 내용=토착종교

토착 종교 내용+외래 문화 형식=혼합주의

외래 종교 내용+외래 문화 형식=외래 종교

외래 종교 내용+ 토착 문화 형식=자생적 기독교

기독교의 내용이 토착 문화의 형식에 적용되어 자생적 기독교를 이루는 결과는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혼합주의를 일으키는 토착 종교의 내용과 기독교의 형식이 접합이 되었을 때에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인식과 해석에 있어서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이 커질 것으로 본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혼합주의적인 기독교 형태가 나타날 경우 자칫 기독교의 내용이 오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혼합주의가 일어나는 원인을 폴 히버트(Paul Hiebert)는 과거 전통이나 관습을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는 흐름과 새로운 형식으로 복음을 인식했을때 혼합주의가 일어난다고 본다. 구체적인 혼합주의 원인으로 식민주의, 문화적 진보, 과학으로 본다. 이 세 가지 원인들 중에서 식민주의 시대 이후에 나타나는 상황화에 대해서 히버트는 세 가지 특징을 지적한다. 첫째, 전통적 고유 음악과 자신 고유의 문화를 기반으로하는 교회의 형식을 형성한다. 둘째, 고등 교육을 받은 현지 리더가 교회와 문화의 상황에 변화를 가한다. 셋째, 간접 지배로 외부 정부나 기금을 통하여 상황에 맞는 고유의 사회 조직을 형성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문화 상대주의를 기반으로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이 닥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이러한 세계관을 지속한다고 히버트는 말한다.

한경직 목사의 신의주 제 2교회 목회시절과 월남 후 벧아니 전도 교회 목회 시절의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기점은 반공에 대한 인식이다. 공산 세력의 진입으로인한 한경직 목사의 기독교 사회 민주당을 결성하면서 “그 강령으로는 민주주의 정부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 개량을 목표로 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히버트의 상황화 이론의 첫째 조건을 적용한다면 벧아니 전도 교회의 생성의 고유 문화 바탕은 반공이라 할 수 있다. 반공의 기본틀은 보다 행동적으로 나타나 영락교회와 서북학생총연맹, 이북학생총연맹, 기독교청년면려회, 대동강동지회, 서북청년회 등이 정치적인 행보를 이어 나갔다. 21세기 교회가 정치에 참여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해방 후 영락교회에겐 무의미 한 것이었다. 영락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반공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레 융합되었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누구도 반론을 제기 하지 않았다. 히버트는 이러한 상황을 “현지 리더나 목사가 어떤 결정을 할 때에 공개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논하지 못하는 것은 저주 받을까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둘째, 현지 리더의 역할로서 한경직 목사는 벧아니 전도 교회가 기존의 교회가 가지는 교회의 문화와 상황을 다르게 이끌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신의주 제 2 교회를 이끌었던 목회 경력과, 학력 등은 앞의 조건에서 두드러진 반공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서북 월남 기독교인들의 응집력을 더욱 높힐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즉, 한경직 목사와 서북 기독교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문화와 상황 가운데 영락교회가 생성되고 성장했을 가능성을 말한다. 셋째, 보다 구체적으로, 한경직 목사의 프린스턴 대학에서의 교육과 북장로 선교사와의 인맥을 통해 지원을 이끌낼 수 있었던 점에서 다른 출옥 성도들이 재건한 남한 교회와는 다른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반공 이데올로기와 한경직 목사, 그리고 월남 서북 기독교인들의 설움이 조합되었을 때는 위의 상황화 세번째 조건과 같이 자신들만의 고유 세계관을 가지고 떠나온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그 세계관을 고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상황화가 일어날 때 어떤 단계를 거치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첫째, 히버트는 자신들만의 고유 신학의 필요성을 느끼고 개발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한경직 목사는 벧아니 전도 교회를 이끌어 갈 기본적인 신학 노선으로 미국 보수 복음주의(칼빈주의)를 따랐다. 문제는 단순히 미국 복음주의 신학을 추구한 것 이외에 한 가지 덧입혀진 것이 있었는데 바로 기독교 국가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반공과 애국을 기초로하는 국가관과 그 모델로 미국 혹은 네덜란드의 복음주의적 국가관을 추구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예로, 한경직 목사는 “교회와 국가를 완전히 분리하는 미국과 화란 같은 칼빈주의 제국이며 교회는 영적 범위 안에서 완전 자유일 것이며 간접적으로는 국가의 정신적 기초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즉, 한경직 목사는 자신의 신학노선에 반공을 지향하면서도 미국이나 네덜란드를 모델로 삼는 기독교 국가를 추구하도록 영락교회를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를 긴장 상징(tensive symbol)으로 해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약속 상징(steno symbol)로 이해하여 정치적인 기독교 국가로 실현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페린(Perrin)은 인간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히버트의 상황화 이론에 비추어 한경직 목사의 벧아니 전도 교회 시절부터 남한 정부 수립 이전까지(물론 그 이후로도)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와 반공, 그리고 미국이나 네덜란드식의 칼빈주의 제국 국가관으로 영락교회를 한경직 목사 고유의 신학과 전도 패러다임으로 상황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

 

3. 한경직의 상황화된 로마식 전도

조지 헌터는 로마식 전도를 복음 제시, 결신, 교회 멤버쉽의 단계로 정리한다. 로마식 전도의 DNA는 문화적 우월성, 군사적 개념의 전도와 형식적인 전도행위”로 나타난다. 이러한 로마식 DNA와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을 볼 때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는 문화적 우월성을 들 수 있다. 리차드 플래처는 신성 로마 제국 시대에 변방에 있는 사람들을 야만인으로여겨 네 발달린 짐승으로 여겼다고 말한다. 한경직 목사와 벧아니 전도 교회는 미국적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국가를 지향하였다. 반대로 말하면, 반공의 기조가 영락교회 자체에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이광순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46년 “기독교와 정치”라는 설교에서 ‘기독교적 이상에 의해 건국’ 해야 한다고 했으며 “새나라의 정신적 기초가 되어야”하는데 그 이유는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반이 기독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947년 12월). 더 나아가서는 미국은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하고(1946년), 미국적인 자유 민주주의에 입각해서 건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함축 되어 있는 것은 영락교회의 교인이 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긴장 상징인 하나님 나라를 약속 상징인 하나님 나라로 이루려는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의 기독교 민주주의에 암묵적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와 기독교에 대해 동의하는 정도가 아니라 좀더 구체적으로 월남한 서북지역 성도들의 특정한 시각 즉, 기독교적 애국 국가관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말하면 38선 이북은 공산주의로 물들어 하나님 나라를 성취할 수 없는, 보다 구체적으로 전도의 대상이기 보다는 적으로 규정하는 흐름이 깔려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 부분이 아래 군사적 모티브에서 보다 구체화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 로마식 전도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군사적 모티브다. 전도를 위해 군사적 수단이 정당화 되었던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10세기-12세기)과 웬디쉬(Wendish) 십자군 전쟁(12세기)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군사적 모티브는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의 반공에 대한 절박성에 잘 나타난다. 전도와 반공을 위해 군사 작전을 동일시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예로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이다. 이 작전이 전도와 군사적인 연계된 사안이었음을 한경직 기념사업회는 다음과 같이 보고 한다.

한경직 목사는 전도를 통해서 개인을 구원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나라를 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해방 후 남한에도 공산당들이 많이 있었고,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도 기독교 동맹을 만들어 가지고 공산당과 협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북에서 피난 온 이북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그래서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서북청년회를 만들어서 여기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 이중 흥미 있는 일은 한경직 목사와 서북청년회들이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과 함께 전도활동을 나섰다 . 1950년 1월과 2월에 걸쳐서 공비가 출현하는 전북 남원에 들어가서 목숨을 건 전도활동을 하였다. 한경직 목사에겐 공산주의를 막는 가장 분명한 길은 복음전도였다

즉, 상황화된 한경직 목사 전도의 저변에 소극적으로는 한경직 목사의 3대 목회 원리에서 나오는 교육과 봉사에서도 그 궁극적 목적은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의 상황화된 전도 패러다임을 보급, 확산 시키기 위함으로 보인다. 적극적으로는 공산주의를 막아야 한다는 강하 신념이 깔려 있어 군사적 행위도 정당화 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능동적 군사적 모티브가 담긴 한경직 목사의 로마식 전도 패러다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군사적 모티브가 이제는 전도를 압도하고 있다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이 갈수록 반공에서 승공으로 넘어가는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이 그의 설교에서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완전히 점령하듯, 남한을 점령하고 북한을 점령하고 나아가서는 삼천만 동포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 나라를 기독교 나라로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이 땅에 70년 전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궁극적 목적이요 경륜이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1955.5.1-가나안 점령의 명령 설교 중)

여기서 나타나는 한경직 목사의 전도는 곧 공산주의로 물들어 갈 수도 있는 남한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구하는 것이 전도라고 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단순히 남한을 북한 공산주의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공산주의를 미국 복음주의적 기독교 애국관을 가지고 ‘점령’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힘으로써 단순히 신앙적 호소가 아닌 적극적 군사적 모티브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한경직 목사가 ‘점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전도학적인 관점에서 로마의 십자군이 이슬람을 향한 기독교 이데올로기적인 역사관을 떠오르게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한경직 목사는 십자군을 실제로 설교에 직접 언급하며 전도를 마치 군대작전과 같이 보이도록 점점 강하게 나타내었다.

전도는 말하자면 현대전쟁과 비슷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선 공군이 동원되어 적진을 넓게 폭격합니다. 이러므로 적을 혼란시킨 다음에 해군이 동원되어 적의 해안에 있는 요새들을 집중하여 함포사격을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 요새를 파괴하여 버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였다고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닙니다. 완전한 승리는 공군과 해군의 공격이 있은 후 곧 육군이 상륙하여 일보일보 적의 진지를 점령하여야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전도전선에 있어서 공군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곧 매스컴 전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 문서전도 등입니다. 이런 전도를 통하여 복음의 폭탄을 던집니다. 또한 해군의 공격과 비슷한 전도가 있습니다. 곧 대전도집회입니다. 작년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와 같이 백여 만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일시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마치 함포사격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일반전쟁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방법으로는 완전히 승리를 거두지 못합니다. 전도에도 보병이 필요합니다. 곧 십자가의 보병이 들어가서 생명 하나하나를 붙잡아 개인전도하며, 교회로 인도하여 계속 도와주어야 합니다.여러분, 우리가 다 빌리 그래함과 같은 전도자는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하나가 십자군의 보병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영적 전쟁에도 완전한 승리는 이 보병이 거두는 것입니다.(1974. 2. 22)

따라서 개인 전도를 하는 것도 사실상 군사훈련과 같은 개념으로 한경직 목사는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기초적인 교리와 더불어 영락교회의 국가관과 미국 복음주의적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소유한 사람들을 많이 길러내는 것이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도 패러다임의 생성 목적은 그 저변에 북한 공산주의에 대적하기 위한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개인전도에 대한 개념을 나타낸 설교이다.

선교하는 교회는 무엇보다도 교인 하나하나를 개인 전도자로 훈련하는 일입니다. 북괴의 소위 4대 군사노선 가운데 한 가지는 사병의 간부화입니다. 아마 그 뜻은 사병까지도 장교처럼 잘 훈련을 시킵니다. 다시 말하면 교인 하나하나를 목사와 장로처럼 훈련하면 그 교회야말로 실로 선교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1975. 목사, 장로 선교대회)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에서 긴장상징으로 보아야할 하나님의 군사를 길러낸다는 차원을 이미 넘어서 있었다. 그의 설교에서 나타난 대북 강경적 자세는 이미 벧아니 전도 교회 시절부터 하나의 신앙적 비유를 넘어 실제적인 방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47년 3월 23일에 설치된 첩보과는 서북청년회의 지하 공작부대를 통해서 다양한 정보를 얻었고,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육군 정보국, 유엔군 유격대(Korea Liasion Office), 한국군 유격대 호림부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1947년 10월 23 일에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한 생도들 중의 서북출신이 3분의 2를 차지하였고 이렇게 입학한 서북 출신들의 5기와 8기는 1961년 5.16쿠데타의 주역으로 활동했음을 윤정란은 보고한다. 따라서 1975년에 이뤄진 위의 설교는 개인 전도에 대한 설교적 비유라기 보다는 실제로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적 애국관으로 무장된 사람으로 훈련(어쩌면 군사적 훈련도 포함한)시켜야 한다는 약속 상징적 하나님 나라의 시각을 반영한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이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형식적인 전도의 행위이다. 한경직 목사의 전도의 정의가 뚜렸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벧아니 전도 교회 초기에서 드러난 교육과 봉사의 개념 속에서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의 확장으로 교육과 봉사를 나타난다. 벧아니 전도 교회를 설립 후 전도 훈련을 위한 구체적인 사역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기 위한 훈련이나 목회적 방침 또한 희미하다. 다만 학교를 세운다든지,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의 대외적인 활동이 두드러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기독교 세계 봉사회(Church World Service:CWS)의 후원이다.

1946년 북미외국선교협회(the Foreign Mission Conference of North America:FMC)와 미국연방교회협의회(the Feder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FCC)에 의해 탄생된 CWS는 월남한 기독교인들을 돕기시작하였다. 이에 윤정란은 “1947년 CWS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월남한 피난민들을 200만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이들을 구호하기 시작했다”라고 보고 한다. 또한 “한경직은 북장로교 선교부와 교섭해 교회 설립 기금 10만 달러, 학교 설립비 5만달러 등 총 15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1948년 10월 이북신도대표회의의 보고에 의하면 총 19개 교회가 서울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고 윤정란은 보고한다. 이는 신성 로마제국이 막대한 자금과 군사력을 지원하며 변방을 전도했던 전형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치명적인 약점은 한 영혼이 각성하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과정이 삭제된다는 점이다. 다만 크리스챤이라는 명패를 가슴에 달아주어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대량 생산했던 신성 로마제국과 유사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4. 한경직의 상황화된 로마식 전도의 나비효과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에 있어서 로마식 전도로 상황화 되는 세 가지 요소들, 즉 미국 복음주의적 반공 애국관, 군사적인 모티브, 형식적인 전도가 가져다 준 영향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히버트는 건강한 상황화가 나타나지 못했을 때 드러나는 세 가지 영향을 이야기 한다. 첫째, 역사적 상황이 무시되며, 둘째 죄에 대한 관점이 약해지고, 셋째, 혼합주의 발생이다.

먼저, 역사적 상황이 무시되었다는 의미는 전도의 역사에서 어떻게 전도가 시대에 따라 오용되고 혼용 되었는지를 간과 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신성 로마 제국 시대의 전도의 과정 중에서 이방인 군사들을 웅덩이에 쳐넣으며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이방신전을 부셨다는 것만으로 전도되었다고 말하는 것, 호수의 신인 자볼신에게 드리던 헌물을 교회에게 드렸을 때 회심했다고 보았다. 이 과정에서 플레쳐는 “기독교로 개종을 강요받은 이방인들의 울음과 원성이 가득했다”라고 보고한다.

한경직 목사는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용인하였다. 미군정기에는 자연스레 반공을 외치게 되었다. 유신시대에는 반공에서 승공으로 기조를 강화하며 유신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양현혜는 한경직 목사의 건국 신앙 논리를 두 가지 점에서 비판한다. “첫째는 한경직 목사가 유신헌법 반대 운동에 서명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한경직 목사가 유신 철폐 운동이 사회 불안을 야기 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결국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비록 정권에 협력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기독교적 건국 신앙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비극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즉, 한경직 목사는 교회사에서 나타난 역사적 증례들을 교훈삼아 전도의 본질을 추구하기 보다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전도를 교회 성장의 시녀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상황화된 로마식 전도는 결과적으로 죄에 대한 인식을 약하게 만든다. 물론, 한경직 목사 스스로 죄에 대한 인식이 약해졌다는 자료를 볼 수는 없다. 다만, 한경직 목사의 상황화된 로마식 전도 패러다임을 담은 말씀의 꼴을 먹은 서북청년회의 행위가 미국 복음주의적 기독교 애국관으로 인해 정당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의 대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라는 것과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5:44)는 명령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일을 자행하게 된다. 서북청년회는 1948년 제주 4.3 사건에 마치 군인과 경찰인척 유니폼만 갈아입고 참여하였다. 이는 십자군처럼 상황화된 전도 패러다임으로 좌파를 이교도처럼 살해해도 된다는 정당성이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경직의 상황화된 로마식 전도 패러다임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에 따르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는 마치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했던 사울의 모순에 빠진것과 같다(행 7:58).

셋째, 혼합주의로 인한 형식적인 전도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경직 목사가 따르는 복음주의는 빌리 그래함이 추구하는 미국 보수적 복음주의라는 점이 웨버(Weber)의 복음주의 차트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미국 보수복음주의에 대한 신학적 평가보다는 역사적인 실천으로 인한 결과로써 평가하려고 한다. 먼저,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의 십자군 전도는 지속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예를 들어, 리차드 피스(Rihard Peace)는 빌리 그래함의 형식적인 전도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한다.

1956년 스코들랜드 글라스고우에서 행해진 빌리그래함 십자군 전도운동에서 52,253명이 결신하였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에 출석한 사람은 7%인 3,802명에 불과했으며 토론토 십자군 전도 운동에서도 8,161명이 참석한 가운데 902명이 교회에 가겠다고 응답하여 11%의 효율을 보였다. 또한 1976년 시애틀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의 다른 십자군 운동사례를 보았을 때 434,1000명이 참석한 십자군 전도운동에서 18,136명이 믿겠다고 결신 카드를 작성했으나 1977년 미국 교회성장 메거진 ‘아메리카’의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결신 작정자 18,136명 중 단 15% 인 1,285명 만이 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교회에 출석했다고 해서 회심을 확신할 수 없으며 또한 제자로 양성되었다는 보고도 없다.

즉, 빌리 그래함의 프로그램식 전도에 있어서 숫자적 결과는 있으나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게 된다. 이와 유사한 한경직의 형식적인 전도를 바탕으로 더욱 심각한 것은 한경직 목사의 군사적 모티브가 담긴 전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이다. 만일 로버트 콜만(Robert Coleman)이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기 위한 전도라면, 오히려 소수에 집중하면서 상당량의 시간과 희생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한경직 목사가 다량의 교회 개척, 학교 설립, 사회 봉사 활동 등을 통해 외적 성장과 숫자적 성장에는 기여했으나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을 만들었는가에 대한 질문은 남게 된다. 특별히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미군정기나 그 이후에 집중된 것은 아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 전반적인 서구 교회의 선교 전략은 이와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아프리카와 한국의 근대사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기독교인 대통령을 가졌다 할지라도 독재라는 독버섯이 자라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지 해야 한다. 또한 사회 변혁을 위한 선교적 인프라를 구축했던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의 대 중국 전략은 1960년대 문화혁명을 통해 그 인프라가 모두 붕괴 되었다. 오직 말씀만 남게 되었다. 이에 대해 다나 로버트는 결국 사회선교 변혁 인프라를 구축했던 19세기 선교전략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제자를 양성했던 씨앗이 남아 부흥의 불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적 모티브와 기독교 교리가 혼합되어 교회 성장의 강한 추진체 역할을 했다. 미군정기에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기독교 교리가 혼합되어 전도라는 미명아래 한경직 목사의 벧아니 전도 교회(영락교회)가 숫자적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5. 나가는 말

전도는 전도의 역사 속에서 승자의 입맛에 맞게 그 패러다임이 바뀌어왔다. 초대교회에서는 눈물로 물들여졌던 전도가 신성로마제국 시대에는 피로 물들어여졌다. 종교 개혁 이후 웨슬리(Wesley)에의해 전도가 성서적 본질이 회복되어질 때 조지 휫필드(George Whitfield)의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전도는 로마식 전도의 DNA를 이어받은 부흥주의 운동으로 인해 제자도와 하나님의 나라가 희미해진 개인구원만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미군정기를 통해 미국 보수복음주의가 반공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급격한 체세포 분열을 이루어 성장했다. 이러한 전도의 혼돈의 역사 속에서 한경직 목사는 필연적 로마식 전도 패러다임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은 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이 그러했듯이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의 반공과 승공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만일 손양원 목사의 주관적 시각대로 한국전쟁이 신사참배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적 사건이었다고 본다면, 한경직 목사가 스스로 찬성한 신사참배로 인해 공산주의가 확산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삶과 사역에 반공의 기조가 드높아 진 것은 결국 자기 자유의지로 인한 행위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경직 목사는 자신의 전도 패러다임에 모순을 발견할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대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라는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 ‘사랑’을 강조하였다(고전 13장). 한경직 목사의 ‘이웃’의 범주 안에 공산주의자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 반면 손양원 목사의 ‘이웃’의 범주 안에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인민군이 들어 있었다.

한경직 목사의 전도 패러다임 속에 공산주의자들은 그와 영락교회에겐 플레쳐의 ‘네 발 달린 짐승’이었다. 18세기 영국 국교회가 교육 받지 못했던 영국 시골 농민들이 결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해방 후 한경직 목상와 영락교회의 기독교는 결코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맨슨(T.W Manson)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일컬을 때 마세테스(ματητεσ)가 아닌 히브리 아람어로 표현되는 슈알리아(shewalya)로 분석할 때, 슈알리아(shewalya)는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을 특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닮아 예수님이 하셨을 행동을 그대로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다시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성경을 따르는 공동체를 추구한다. 어떠한 정치적인 입장이나 이데올로기로 인해 점유되거나 이용 혹은 오용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에 슈테판 스트라우스(Stephen Strauss)는 안디옥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임을 밝혔다.

미군정기 대표적인 성장을 이룬 교회 중에 하나는 한경직 목사의 벧아니 전도 교회(영락교회)다. 해방과 한국 전쟁, 4.19와 5.16 쿠데타를 이어 오면서 영락교회는 꾸준히 성장해왔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최근 5년간의 교회 성장을 물어보았을 때는 ‘민감한 사항’이라 대답할 수 없는 항목이 되었다. 1992년 3월 11일 뉴욕의 유엔교회센터에서 한경직 목사는 “20세기가 낳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목사”로서 템플턴 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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