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회 사중복음의 교리사적 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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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영 박사

 

I. 들어가는 말

 

기독교의 주요 교리들은 교회의 탄생 이후 동시다발적으로 발전되었는가? 아니면, 특정 교리가 세밀하게 논의되어 명료해진 후 다른 교리가 명확해지는 방식으로 하나씩 발전되었는가? 도날드 맥킴에 따르면, 기독교 교리는 “보다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얼마간의 답이 주어지면, 그 다음 문제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기에, “교회 안에는 어떤 확실한 사상의 궤도가 있었던 것이지, 교리가 아무렇게나 나타난 것은 아니다.” 기독교 교리의 발전이 논리적 순서를 가진다는 주장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교리사가들이 교리 발전과정을 통시적으로 기술할 때에는 대체로 삼위일체론에서 시작하여 기독론, 교회론, 인간론, 권위론, 구원론, 권위론, 성례론, 종말론 등의 순서로 나아간다.

교리사에서 사중복음은 언제 등장한 것일까? 사중복음은 성경 속에 이미 존재하고, 역사적으로도 교회가 언제나 선포해온 복음의 핵심진리들이다. 그러나, 신학의 많은 주제들 중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 “사중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묶여져서 함께 강조된 것은 교리사적으로 매우 후기에 속하는 현상으로, 그 각각의 교리가 충분히 발전 되었거나 발전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사중복음은 그 자체가 이미, 성경적 진리들의 단순한 병행적 나열이 아니라, 다양한 기독교 전통들 사이의 교리적 논쟁과 보완, 발전의 오랜 과정이 함축된, 고도의 신학적인 개념인 것이다.

본 연구는 사중복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중복음의 교리들이 교회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지 시대적 순서에 따라 개괄하는 것이 목표이다. 시대구분은 교회사의 일반적인 방법을 따라, 그레고리1세가 교황좌에 오른 590년 이전의 교부시대, 그 이후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까지의 중세시대, 16세기의 종교개혁시대, 18세기 존 웨슬리의 시대, 그리고 19세기 성결운동 시대로 구분하였다. 연구의 본론으로서 각 시대에 대한 개괄이 끝난 후에는, 사중복음의 각 교리가 어떤 변천을 겪었는지를 약술함으로써 연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II. 사중복음과 교부시대

 

사도들의 죽음 이후 교회가 성경의 진리를 교리적으로 체계화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교부들은 구원의 과정보다 구원의 본질 이해에 초점을 두었다. 교부들은 하나님 지식에 대한 교화(사도적 교부들과 변증가들), 그리스도의 총괄갱신을 통한 회복(이레니우스), 죄에 진노하신 하나님께 대한 배상(터툴리안), 사탄에 대한 승리(오리겐), 신화(동방 교부들) 등 구원의 포괄적인 요소들을 설명함으로써 구원 이해를 넓혀나갔다. 이 시기에 충분히 발전되고 명확히 진술된 중생과 성결론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교부들의 구원론이 중생의 변화를 포함한다는 사실과, 풍부한 성결의 증언들을 가졌음은 분명하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사랑”이 죄에 대한 승리와 사랑의 삶을 가능케 함을 가르쳤고, 그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을 갖게 되었다고 증거하였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시대마다 참 경건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사랑으로 온전케 된 사람들”이라고 설명하였다. 폴리캅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의의 율법 완성과 죄에 대한 승리가 가능함을 가르쳤다. 헤르마스는 세례 받은 신자들의 위선과 내면적 죄들을 폭로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덧입는 순결과 완전을 바른 신자의 표준으로 제시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총괄갱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끝나지 않고 성령의 역사로 교회 속에서 이어짐을 가르쳤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중생한 자는 누구나 “전력을 다하여 무죄한 상태에 있기를” 노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 “먼저 죄와 약점을 제거하고, 다음으로 죄를 향한 상습적 경향 뿌리 뽑기”를 권면하였다. 313년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과 장려정책이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를 가져온 이후에도, 교회 내 중생과 성결 강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집트 교부 마카리우스는 기독교를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이 가져오는 인간의 “변모와 갱신”으로 설명하였다. 이로써 영혼에 존재하던 악의 샘은 마르고 정욕이 제거되며,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가득 채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기독교를 “신성의 모방”으로 이해하고,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영적 성숙의 과정에서 끊임없는 성장과 진보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중생과 성결의 가르침은 어거스틴에게서 변화를 겪는다. 하나님을 인간의 영혼이 만족할 수 있는 최고선으로 묘사한 어거스틴은, 자신이 하나님을 향유하여 만족을 누림으로 죄와 불순종이 “얼음처럼 녹아”버리고 “제거되었음”을 체험적으로 고백하였다. 그러나, 교리적으로는 중생의 변화는 인정하면서도, 성결을 인정하지 않았다. 육체의 본능과 죄를 동일시하는 헬라 이원론 및 펠라기우스 논쟁의 결과로 비관적 인간론을 갖게 된 것이, 성결의 가능성을 부정하도록 영향을 끼친 것이다. 5세기 프랑스 교부 빈켄티우스는, 이후 16세기 네덜란더의 아르미니우스처럼, 교부들의 가르침을 연구한 후 어거스틴의 이중예정론과 노예의지론 등의 교리가 이전 시대에는 없었던 창작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반적으로 교부시대는 중생과 성결을 교리적으로 강조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실제적 은혜를 보다 일상적으로 경험한 시기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광범위한 영향력은 교리사에 인간운명에 대한 결정론과 성결에 대한 비관론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교부시대의 신유로 넘어가보자. 모튼 켈시는 자신의 책 『치유와 기독교』(1973)에서 순교자 저스틴, 오리겐, 터툴리안, 헤르마스, 이레니우스, 콰드라투스, 안디옥의 데오필루스, 락탄티우스, 갑바도기아 교부들, 크리소스톰, 팔라디우스, 아타나시우스, 마카리우스, 어거스틴, 암브로시우스, 카씨안, 제롬, 대그레고리우스 등에 의한 신유의 기록들을 수집한 후, “거의 모든” 교부들이 신유의 역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초기3세기 동안 신유는 사도시대와 유사할 정도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직간접으로 참여한 종교적 경험의 실체”였다고 결론 내렸다. 켈시의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교부시대 후반기인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313년) 이후에는 교회 내 신유의 증언이 현저히 줄어든 사실 역시 인지되어야 한다. 오리겐은 “기적은 예수님의 말씀 선포와 함께 시작되어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크게 증가했다가 그 뒤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기적의 몇몇 흔적은 말씀으로 영혼이 청결하게 된 소수에게 남아 있다”고 기록하였다 페투아의 빅토리아누스,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대 그레고리우스와 같은 이들도 초대교회와 달리 당대에 기적적 은사들이 희귀해졌음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또다시 신유의 증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러한 증언들은 “오늘날 어느 누구도 그 모든 기록을 진정한 성경적 기적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을” 미신적인 이야기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교부시대 전체에 신유의 증언은 지속되었으나, 후대로 갈수록 그 빈도는 줄고, 내용은 미신적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교부시대의 종말론은, 신자들이 박해 가운데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대하던 약 4세기 초까지의 시기와, 밀라노칙령 이후 종말론적 긴장이 이완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부활, 심판, 천년왕국의 성격 등을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다. 파피아스는 천년왕국을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로 보았고, 『바나바 서신』은 거의 끝 무렵에 와있는 인류역사 6천년 이후 제7번째 천 년에 그리스도께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세상을 새롭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의 영적 부활론을 반박하여, 몸의 부활을 강조하였다. 성도들이 부활하여 평화의 세계로서 천년왕국을 누린 후, 모든 불신자들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이 있고, 그 후 새 하늘과 새 땅은 “창조세계의 실체와 실존”을 유지할 것이지만, 그 속에 있던 죄와 부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오리겐은 묵시적, 지상적 천년왕국론을 거부하고, 육체적 부활 대신 영적 몸의 부활, 영원 형벌 대신 영혼 선재 및 치유적 형벌 이후 만물의 보편적 회복을 주장하였다.

임박한 종말 기대에 변화가 생긴 것은, 밀라노칙령 이후부터이다. 유세비유스는, 이레니우스의 미래적인 천년왕국론과 세상의 새 창조를 부인하고, 콘스탄틴의 로마 제국을 천국의 지상적 확대로 보았다. 어거스틴 역시 무천년주의적, 현재적 천년왕국을 주장하였다. 계시록 20장의 첫째 부활을 중생으로 해석하고, 천년왕국을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된 교회시대로 해석하였다. 사탄은 이미 결박되었고, 심판의 보좌들은 교회의 권위를 의미하며,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이미 왕 노릇 하는 것으로 가르쳤다. 둘째 부활은 마지막 때 모든 육체의 부활로서, 최후의 심판에서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둘째 사망을 면제받고,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전반적으로, 교부시대 초기의 임박한 종말과 미래적, 전천년적 천년왕국론은, 후기로 갈수록 현재적, 교회론적, 무천년적 혹은 후천년적 종말론으로 대체되었다.

 

III. 사중복음과 중세시대

 

교리사에서 구원론의 본격적인 논의는, 5세기 초 어거스틴-펠라기우스의 논쟁이 인간론과 은총론, 구원론을 포괄하는 폭넓은 교리 논쟁을 촉발시킴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정치적 성공과 함께 칭의 교리 정립이 부차적 관심으로 밀려남으로써 구원론의 “상당한 혼란”은 해결되지 못한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에 의하면, 중세 카톨릭교회는 418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와 529년 오랑주 제2차 종교회의에서 칭의 교리를 다룬 후로, 1545년 트렌트 종교회의 때까지 칭의를 주제로 종교회의를 소집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16세기 루터가 성경적 구원론 확립을 기치로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위성이, 중세 교회의 구원론 속에 내재했던 것이다.

중세 카톨릭의 구원론을 초기, 전성기, 후기의 주요신학자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중세 스콜라신학의 기초를 놓은 어거스틴의 신학은, 초기 마니교적 숙명론에 반대하여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경향과 후기에 펠라기우스의 낙관론적 인간론에 반대하여 구원에서 은총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함께 존재한다. 중세 스콜라신학의 전성기를 이끈 토마스 아퀴나스는, 구원을 죄인이 성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구원은 죄인에게 은총이 주입되어 신앙을 갖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지적 활동으로서 신앙은 불완전한 회심을 가져오므로, 사랑의 의지적 활동으로 회심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랑 없이 신앙만으로는 구원에 충분하지 않으므로, 구원의 첫째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 둘째 원인은 인간의 행위가 된다. 중세 후기 유명론자 가브리엘 비엘은, 사람이 은총이 없이도 자연적인 능력으로 죄를 짓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상으로 구원하신다고 가르쳤다. 구원은 자신 안에 있는 능력으로 최선을 다한 데 대한 보상이다. 중세 카톨릭교회의 구원론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공로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펠라기우스적 오류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이처럼 구원론의 오류에도 중세의 신비주의 작가들 중에는 중생과 성결에 대한 추구 및 체험적 증언이 유지되었다. 몇 가지 예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기독교의 근본 덕목으로 제시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함몰됨으로써 신의 성품을 가질 때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한 사랑을 목표로 삼은 후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주장에 반대하고, 마5:48이 명령하는 완전의 본질은 사랑이며,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연약성을 가진 인간에게 어떤 한계도 없이 모든 종류의 사랑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랑에는 세 종류, 즉 하나님 존재에 적합한 사랑, 모든 능력을 다하는 사랑, 사랑에 반대되는 것을 하지 않는 사랑이 있는데, 인간에게 가능한 사랑은 세 번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한 완전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의 의도와 반대된 것을 이겨내는 정도의 완전이지, 100% 완벽한 실천을 변함없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완전은 아니다. 프랑수아 페넬롱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완전한 사랑”이며, “그리스도의 사심과 같이 살고, 그의 생각같이 생각하고, 우리를 그의 형상에 일치시킴”으로 이 세상에서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성결을 부정하는 자들은 우리 속에서 그 일을 이루시는 성령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다.” 중세시대는 전반적으로 성화를 칭의의 조건으로 여기는 구원론적 오류를 확대시킨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성결에 대한 열망과 체험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유에 대한 중세 카톨릭교회의 입장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다. 주요 성인들에 의해 신유 증언이 이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인과 순교자들에 대한 숭배, 성보 매매, 기독교 마술, 귀신론에 대한 과도한 집착, 기적 장사” 등 미신적인 이야기들이 만연했다. 필립 샤프는 이 시기에 얼마나 황당무계한 기적이야기들이 난무하였는지 그 예들을 잘 보여준다. 은사중지론적 입장도 있었다. 아퀴나스는, 성경 속 기적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참됨을 입증하는 표적으로서 제 몫을 다한 후에 더 이상 필요가 없기에 중지되었다고 보았다. 중세 카톨릭교회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퀴나스에게서 은사중지론이 나온 것은, 당시에 만연하던 기적 이야기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창작이었는지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유가 희귀하여진 것과 맥을 같이 하여, 교부시대로부터의 치유의 성사는 임종을 준비하기 위한 도유(종부성사)로 바뀌고, 병자에 대한 심방이나 귀신 쫓는 안수 등에 법적 제한이 가하여지는 변화도 일어났다. 교회의 강조는 점진적으로 “치유로부터 용서”로 옮겨졌다.

종말론에서 중세 카톨릭교회는 어거스틴의 영향 아래 미래적 천년왕국설을 거부하고, 현재적, 교회중심적 종말론을 강화시켰다. 계시록 20장에 대한 어거스틴의 교회론적 해석은, 중세 스콜라신학에서 전천년설이 쇠퇴하고, 하나님 나라를 카톨릭교회와 동일시 하는 후천년설 또는 무천년설을 수용하게 하는 데 결정적 요인을 제공하였다. 플로리스의 요아킴(1131-1202)은 드물게 어거스틴을 따르지 않고 중세 카톨릭에는 매우 낯설어진, 임박한 종말과 미래적 천년왕국을 가르쳤다. 아퀴나스는, 엄격한 의미로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 천상적 교회이지만, 지상의 교회가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라고 가르쳤다. 그 외에 중세 카톨릭 종말론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연옥 교리의 발전이다.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리를 정리한 트렌트 공의회(1545-1563)는 종말론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기보다 연옥의 교리를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IV. 사중복음과 16세기 종교개혁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은 펠라기우스주의에 빠진 중세 카톨릭교회의 인간중심적 구원론을 극복하고, 구원을 하나님의 은총 위에 정초시키기 위한 개혁이었다. 중세 스콜라신학이 어거스틴 신학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점차 확대해나간 것과는 정반대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은 어거스틴 신학의 하나님 은총의 절대성 강조를 더욱 첨예화시켰다.

루터 신학의 특징은, 안더스 니그렌이 잘 묘사한대로, 대중적 천주교의 도덕주의, 스콜라신학의 이성주의, 하나님과의 연합을 체험적으로 추구하는 신비주의 모두에서 드러나는 중세 카톨릭의 인간중심의 상향적 신학을,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 중심의 하향적 신학으로 바꾼 데 있다.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신뢰하는 도덕주의적 공로사상과,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신뢰하는 스콜라신학적 이성주의, 인간과 하나님의 합일이라는 교만한 신비주의는 부정되고, 하나님의 예정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를 통한 구원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하향적 계시, 죄인이 감당할 수 없는 초월적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 의존과 찬양만이 긍정된다. 이러한 타자적, 하향적 은총의 강조로 인하여 루터의 중생관은, 하나님의 타자적 은총에 의한 신자의 변화는 긍정하되, 신자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특징을 나타내 보인다. 이것이 루터의 유명한, 동시에 의인이자 죄인으로서의 신자의 교리이다. 타자적 은혜가 없다면, 신자 자신의 내적 자질은, 불신자와 전혀 다르지 않다. 더 나아가, 타자적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신자가 죄인이므로, 중생의 변화는 제한적이다. 따라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총으로서 칭의와 그 결과로서 중생 사이의 관계를, 전자의 은혜는 완전하지만 후자의 변화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철저히 구분한다. 루터의 구원론은 비록 중생의 변화를 포함한다 하더라도, 그 초점이 철저히 칭의에 주어졌다.

타자적 은혜와 칭의에 대한 루터의 강조는, 자연히 교회의 실천에 있어 복음 선포의 강조로 연결되었다. 루터에게 율법은 복음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교회가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앙을 일으키는 것은 복음에 대한 신앙이라는 점에서, 교회의 실천은 언제나 복음 선포를 위한 실천들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강조는, 루터의 의도와 달리, 많은 이들이 율법무용론적 나태와 방종에 빠져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칼빈은 칭의와 중생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신자가 받는 “이중의 은혜”로 설명함으로써, 중생을 칭의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은혜로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로써 칼빈은 루터의 지나친 칭의 강조가 가지는 율법무용론적 결과를 극복하려 한 것이다. 칼빈의 구원론의 차별성은 중생에 대한 이해에서 구체화된다. 칼빈이 루터보다 진전된 점은, 중생에서 일어나는 신자의 변화를, 신앙과 성령에 의한 타자적 은혜로만 기술하지 않고, 죄인의 내재적 본성이 “새로운 영적 본성”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을 중시하였다는 점과, 이 본성으로 인해 죄가 중생한 신자에 대해서는 “지배력”을 가지지 못함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중생한 신자의 본성의 변화에 대한 칼빈의 긍정적 시각은, 율법의 제3용법에 대한 가르침과 연결된다. 칼빈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할 의무와 긴밀히 연결시켰다. 개인적 차원에서 율법의 제3용법뿐만 아니라, 교회적 차원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따른 치리 실행을 교회의 거룩성 보존과 향상의 중요 수단으로 삼았다. 중생, 율법의 제3용법, 치리의 중요성 강조의 결과는, 존 녹스의 찬사처럼, 제네바가 “사도 시대 이후로 이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가 되게 하였다. 필립 샤프는, 정통 루터파 신자 독일의 안드레애 박사가 칼빈이 죽은 지 50년이 지난 후 제네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진지함과 도덕적 순결함으로 인해 받았던 깊은 감동을 전달해준다.

칼빈의 구원론은 칭의와 중생을 함께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칭의에 초점이 맞추어진 루터의 구원론보다 중생의 교리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과 루터의 구원론 사이에 큰 교집합은, 중생한 신자의 죄 된 상태에 대한 이해이다. 칼빈에 의하면, 비록 “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지배력은 잃는다 할지라도 소멸되지는 않는다.” 신자들은 “여전히 죄인”이다. “중생한 사람 안에는 악을 촉발시키는 불씨가 남아 끊임없이 정욕의 불길이 튀어나와 죄를 짓도록 자극한다 ... 죄는 하늘에서만 소멸되며, 이 땅에서는 신자들이 육의 욕망에 굴하는 동안에는 죄를 짓는다.” 즉, 그들은 18세기의 웨슬리가 가르친 의미의 성결을 부정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에밀 두메르그가 말한 “모순의 신학” 또는 “이율배반의 신학”의 특징은 루터와 칼빈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한편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인 신앙이 신자에게 일으키는 변화를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하나님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항하는 신자의 상태가 항상 긍정적이지는 못하다. 하나님의 은총도 죄의 현실주의를 극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죄는 신자를 겸손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으로까지 높여진다.

신유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가르침은 은사중지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루터는 말년에 자신의 기도를 통해 후계자 멜랑히톤이 죽음을 벗어나는 신유의 은혜를 경험하였으며, 5년 후이자 죽기 전 해(1545년)에는 야고보서의 치유의식에 대하여 “이것이 우리가 행하는 일이고 우리는 이러한 일을 행하는 데 익숙합니다 ... 우리는 이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정신착란으로 고통 당하는 한 가구상을 치유하였습니다” 라고 기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 젊었을 때에는, 계시의 기록이 완수된 후 “새롭고 특별한 계시나 기적이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기적은 끝났고, 신유라고 말하는 기적들은 악마의 술책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칼빈 역시 『기독교강요』에서 “사도 시대에 안수함으로써 주시던 기적적인 권능과 나타난 역사는 이미 중단되었다”고 확언하였다. 초자연적 신유와 예언 등의 은사는 사도들에게만 주신 표적이었으며, 말씀이 충분히 드러난 이후에는 사도직과 함께 초자연적 은사들이 중지되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이 사도적 영감을 받았다는 주장이나 중세 교회가 꾸며낸 기적들로 혹세무민하는 것에 대항하는 논증으로 은사중지론을 주장하였으나, 후대에는 그 상황이 아닌 논증만 남게 되었다. 은사중지론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서 동일하게 반복된다.

루터, 칼빈의 종말론은 기본적으로 어거스틴의 무천년설적, 교회 중심적 종말론을 수용한 것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미래 통치로서의 천년왕국이 아니라, 교회론적, 현재적으로 성취된 천년왕국과 그리스도의 통치를 믿었다. 요한계시록을 역사주의적으로 해석하여, 교황과 터키를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두 짐승으로, 교회 안팎의 사건과 재해들을 종말의 징조로 간주했다. 칼빈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 교회 안에 있음을 믿었지만, 그럼에도 역사의 초월적 목적인 하나님 나라가 현세에 온전히 구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칼빈이 지상적 천년왕국 사상을 거부한 것은, 아직 완전히 갱신되지 않은 세상에서 제한된 기간 동안의 가시적 왕노릇이라는 개념을 “유치한 억측으로서 반박할 가치조차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시적 재림만이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현시를 가져올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초기 기독교 교부들과 중세 요아킴의 묵시적, 미래적 종말론 전통을 이어간 이들은, 급진적 종교개혁자들인 토마스 뮌처, 그리고 스위스 형제단들과 멜키오르 호프만 등의 재세례파들이다. 이들의 종말론은 크게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조용한 종말론과, 폭력적으로 천년왕국을 실현하려 했던 폭력적 종말론 두 가지로 구분된다.

 

V. 사중복음과 18세기 존 웨슬리

 

루터와 칼빈의 사후에는 매우 차가운 신학을 전개한 개신교 스콜라주의 시대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 반작용으로 17세기의 종교개혁 제3세대 그리스도인들은, 정확한 교리만이 아니라 신앙으로 인한 마음의 기쁨과 삶의 변화를 갈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어난 루터란 경건주의 운동과 칼빈주의의 청교도운동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법적 선언으로서 칭의를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신자의 실제적 변화로서 중생과 성화를 매우 강조하였다. 신앙에서의 강조점이 교리 즉 정통(Orthodoxy)에서부터 정감(Orthopathy)과 정행(Orthopraxy)으로 옮겨졌다. 체험적 측면에서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죄의 자각과 참된 회개, 회심의 경험, 성령의 증거에 의한 구원의 확신이 강조되고, 실천적 측면에서는 직업과 생활에서의 성실과 선행, 경건의 향상을 위하여 철저한 주일성수, 예배, 기도와 소그룹 모임에서의 상호 돌봄을 통한 영적 훈련, 세계 선교와 인류에 대한 박애 및 교육, 봉사, 구제, 선교를 위한 헌신이 장려되었다. 경건주의 지도자들 혹은 그룹들 중에 오순절적 성령의 체험을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경험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경건주의자들은 교리적으로는 루터와 칼빈 신학 전통에 속하여 있었지만, 그들보다 성령의 역사로서 신자의 변화 가능성과 죄에 승리하는 삶을 가르치는 데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신유 이해에서도 “경건주의의 성경적 실제주의와 목회방침은 기도와 신앙을 통한 치유 교리”를 통해 은사중지론을 뛰어넘었다. 경건주의운동에서는 초대교회 이후 오랫동안 소실되거나 약화되어온 체험적이고 실천적인 신앙이 회복되었다.

18세기 존 웨슬리의 신학과 부흥운동은 경건주의자들의 이러한 체험적, 실천적 신앙 및 은총의 수단으로서 삶의 규율과 경건 모임이라는 소중한 영적 유산들을 충분히 이어받고 발전시킴으로 가능하였다. 웨슬리가 어린 시절부터 경건의 실천을 몸에 익히고, 대학시절 홀리클럽 활동에 적극적이었으며, 올더스게이트의 복음적 회심을 경험하고, 중생과 성결을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청교도 목회자들이었던 친가와 외가의 가계 혈통의 영향, 모라비안과 할레 경건주의자들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그들과의 접촉을 통해 웨슬리는 참된 기독교 이상과, 확신의 교리, 구원 얻는 신앙과 이신칭의 등 종교개혁 신학의 정수를 배웠다. 웨슬리의 신학, 특히 그의 성결론을 형성한 원천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영국국교회 전통을 통하여 전해진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 신학전통들을 포함한다. 초대교회 전통, 동방정교회 전통, 로마 카톨릭 전통, 아르미니안주의 전통, 청교도 전통, 독일 경건주의와 거룩한 삶 전통, 심지어 급진 종교개혁전통 을 포함하는 다양한 신학 전통들이 함께 어우러져, 웨슬리의 중생과 성결론의 토대가 되었다.

웨슬리의 칭의론은, 칭의를 하나님의 법적 무죄선언으로 이해한 루터를 계승하지만, 동시에 칭의 받은 신자에게는 본성의 변화와 하나님께 순종할 능력이 주어진다는 칼빈의 중생론도 계승하였다. 칼빈을 뛰어넘는 웨슬리의 중생론의 특징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중생한 신자는 죄에 대한 강력한 저항력과 억제력을 갖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웨슬리의 중생론을 간단히 이해하려면, 흔히 칼빈주의자들이 구원받은 신자의 제2차적 경험으로서의 성령세례를 부인할 때 사용하는 주장으로서, 구원사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시대들(또는 경륜사, dispensations)과 구원의 순서(또는 구원의 서정, ordo salutis) 사이의 구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구분에 따르면, 신앙에 의한 칭의, 중생, 성결과 같은 사건들은 하나님의 섭리 시대를 설명하는 용어들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의 단계 혹은 순서를 설명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세례가 임한 오순절은, 개인적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이전과 다른 시대를 여는 역사적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은 역사 속에 유일무이한 구속사적 사건이라는 데는 웨슬리도 동의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오순절을, 유일무이한 구속사적 사건이라는 의미로만 제한하지 않고, 동시에 개인의 구원의 과정에서 경험되는 더 높고 충만한 은혜의 단계라는 “비유적” 의미로도 사용하였다. 반복될 수 없고 영속적 효력을 가진 오순절이라는 구속사적 사건이 개개인에게 다시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개인의 구원의 서정 가운데 경험되는 은혜의 충만함이 마치 오순절에 비견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구속사적 사건으로서 오순절과, 구원받은 신자의 충만한 은혜 경험은 둘 중에 양자택일해야 할 사항이 아니라, 둘 모두여야 한다는 것이 웨슬리의 가르침이다.

전자의 의미로 웨슬리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이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음을 가르친다. 오순절 이후 모든 신자들은 그 이전 시대에는 주어지지 않았던 종말론적 은혜로서 성령을 받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특권으로 누린다. 이 성령론적 축복을 묘사하는 용어로 웨슬리는 “성령을 받다,” “성령세례를 받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다” 라는 세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 중 성령 받는다,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였다. 어떤 예외도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칭의 받고 중생할 때 “성령을 받거나” 또는 “성령세례를 받는다.” 후자의 의미에서 웨슬리는 성령 받음이나 성령세례 받음이라는 표현을, 온전히 충만하게 받는다는 의미로는, 성결한 자들에게 사용하였다. 웨슬리는, 성결케 하시는 은혜는 오순절 날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오순절이 충만하게 임할 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세 번째 표현 “성령으로 충만케 되다”는 주로 성결의 은혜와 연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이 표현을 배타적으로 성결한 신자에게만 적용하지 않고, 때때로 “모든 진정한 신자들”에게 적용하였다.

케네스 콜린스에 의하면, 세 가지 성령론적 표현들을 성결 뿐만 아니라, 칭의, 중생에도 적용함으로써 웨슬리가 의도한 바는, “칭의 받고 중생한 신자라면 이미 누구라도 성령의 풍부한 역사들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허버트 맥고니글의 말로 다시 설명하면, 웨슬리는 신자들에게 성결이 신앙의 목표라고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칭의와 중생 단계에서의 은혜를 폄하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루터,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과 비교할 때 두드러지는, 중생의 상태에 대한 웨슬리의 강조점은, 칭의 받고 중생한 자는 이미 죄에 대하여 강력한 저항력과 이길 힘을 갖는다는 데 있다. 중생의 상태를 “의인이자 죄인” 혹은 그 내면에서 새 본성과 옛 본성이 싸우는 전쟁의 상태로 묘사한 종교개혁자들뿐만 아니라, 이후 19세기의 많은 성결운동가들이 “겨우 칭의만으로는”, “겨우 중생만으로는”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성결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어조에서 드러나는, 중생한 자의 죄에 대한 율법무용론적 변명에 웨슬리는 분명한 반대를 표현한 것이다. 중생의 상태를 죄에 취약한 상태로 묘사하거나 중생의 은혜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는, 웨슬리의 성결론을 “성령세례”라는 성령론적 용어로 해석한 존 플레처와 조셉 벤슨에게 웨슬리가 강조한 내용이기도 하다. 은총의 어떤 단계에 있든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능력의 힘 입어 “죄 짓지 않을 수 있을 정도만큼은 완전”하다. 다시 죄 지을 가능성은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19세기 성결운동이 주로 성령론적 용어로 성결을 설명한 것과 비교할 때,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처럼 행하게 되는 것”이라는, 보다 기독론적 용어로 성결을 설명하였다. 성령론적 용어로 성결을 설명할 때에는, 성결을 성령으로 인한 신자의 변화로서 성령의 열매와 연결시켰다. 이는 성령론적 성결론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한 확신과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에 대한 깊은 깨달음, 신자의 성품과 삶의 변화, 충만한 사랑의 능력을 부여한다고 하는, 은혜의 포괄적 요소를 간과하고, 성령세례가 하나의 황홀경적, 순간적 경험으로 축소되고 율법무용론으로 왜곡되어 또 하나의 열광주의, 광신주의로 타락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신유에 대하여,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시대에도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행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다니엘 제닝스의 『웨슬리와 초자연적 사건들』(2005)이라는 책은, 웨슬리 자신이 삶과 53년간의 목회사역 현장에서 직접 지켜보았거나 자신이 경험한 초자연적 사건들 중 주된 내용을 그의 일기, 편지, 설교 등에서 발췌하였다. 선별된 내용에는 축귀 등 귀신과의 영적 전쟁 16차례, 자신과 지인, 심지어 말에게 일어난 신유의 체험 17차례, 쓰러짐과 입신 19차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거룩한 웃음과 귀신에 사로잡힌 사악한 웃음 12차례, 성령의 임재에 압도된 결과로서 마음의 괴로움과 회개, 위로, 확신, 진동 등의 경험들 14차례, 거짓 예언들과 참 예언들 11차례, 꿈과 환상 30차례, 악인으로부터의 초자연적 보호 10차례, 천사에 의한 인도와 보호 9차례, 그 외에도 많은 기도에 대한 기적적 응답들, 성령세례의 현상들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들에 대하여 웨슬리는 “나는 이 세상 끝날까지 어느 시대, 어느 순간, 어떤 정도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기적 행하시기를 멈추실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신약에서든 구약에서든 ... 기적이 사도들의 시대 ... 혹은 특정 시기에만 한정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어떤 성경구절도 알지 못한다”고 확언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은사중지론에 반대하여 웨슬리는, 콘스탄틴 이후 시대에 “기독교 교회 내에서 성령의 은사들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 진정한 이유”는, 은사가 중지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식어서 ..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없게” 된 것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웨슬리의 신유는 육체적 건강 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과 영적 온전성 회복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신유는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에 부합하도록 살아감으로써 누리는 은혜이자, 과학과 의학을 통해 주시는 치유의 은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그 자신이 건강에 유익한 삶의 방식 유지를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아픈 이들의 건강 회복을 위하여 『기초 의술』(Primitive Physics)이라는 의학서를 집필하기도 하고, 전기치료기를 만들어 환자들 치료에 큰 효과를 보기도 하였다. 루터와 칼빈이 중세 카톨릭의 잘못된 신학의 영향 하에서 지나친 고행과 학업 등으로 젊은 나이에 건강을 잃었다고 한다면, 웨슬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포괄하는 바른 식견을 가진 부모로부터 어려서부터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건강을 지키는 법을 배운 것이, 그 자신이 88세 때까지 초자연적 신유와 전인적 건강으로서 신유를 함께 누린 비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린 루터, 칼빈에 비하여 복음적 신인협력으로서의 은총관이 신유에 대한 이해에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의 종말론에 대하여는, 그가 전천년주의자였는지 후천년주의자였는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전천년주의적 해석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지상에서 가시적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라 주장한 토마스 하틀리의 종말론 책을 읽은 후 웨슬리가 저자에게 쓴 편지에서 “최근에 천년왕국에 대한 당신의 책을 구해 읽었습니다. 적절한 시기에 그 위안이 되는 교리를 강하게 변증해준 것에 감사 드립니다. 성경을 믿는 이상, 나는 그 교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라고 표한 사실을 중시한다. 또한, 웨슬리가 요한계시록 해석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였다고 밝힌 요한 벵겔의 해석도 웨슬리를 전천년주의자로 여기게 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벵겔은 1836년에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천년왕국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후천년주의적 해석은, 웨슬리가 벵겔의 견해를 소개할 뿐이지, 그의 해석이 꼭 옳다고 믿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비록 벵겔의 도움은 받았지만 웨슬리는 계시록이 자신에게 여전히 비밀투성이의 책이라고 여겼다. 계시록 20:4-5절 주해에서 웨슬리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것이 “하늘에서” 이루어진다고 한 점에서도, 지상에서의 가시적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전천년설적과 다르다. 웨슬리는 계시록20장에서 사탄이 결박되고 땅 위에서 교회가 번성하는 천년왕국(계20:2-3, 7)과 성도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천년왕국(계20:4-6)이라는 이중의 천년왕국을 제시하면서, 그 이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는데, 재림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최후 심판을 위해서라는 점에서도 전천년설과 다르다. 무엇보다, 웨슬리가 하나님께서 메소디스트들을 일으키셔서 영국과 미국에 성결의 복음을 확장시키셨고 앞으로 온 세상에 확장시키실 것이라는 낙관적 역사관을 피력한 사실은 웨슬리를 후천년주의자로 볼 수 있는 강력한 논거가 된다.

 

VI. 사중복음과 19세기 성결운동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18세기 후반 미국에 전파된 후, 19세기 전반기 동안 미국 감리교는 수적으로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감리교 내에서 성결에 대한 체험과 강조는 점차 약해지게 된다. 19세기 성결운동은 웨슬리의 신학적 강조점이자 실제적 체험으로서 성결에 대한 강조가 감리교 내에서 쇠퇴하고, 감리교가 지속적으로 세속화, 교권화 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성결운동으로 생겨난 성결교단들이 웨슬리와 어떤 관계인지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에 있었던 감리교회의 분열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840년대부터 미국 감리교는 계속적으로 분리되었는데, 분리의 양상은, 성결교리와 상관없이 일어난 초창기의 분열과, 성결교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후의 분열로 크게 구분된다. 전자의 분열은,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측과 옹호하는 측이 남감리교회와 북감리교회로 분열되고, 감리교회의 감독제도에 반대하는 이들이 웨슬리감리교회로 분리되는 등 사회적, 제도적 이슈가 중심이었다면, 후자의 분열은 웨슬리의 가르침이자 감리교의 영적 DNA였던 성결에 대한 강조가 감리교에서 쇠퇴하자, 감리교 내부에서 성결회복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세속화, 교권화된 감리교회가 수용할 수 없게 됨으로써 생겨난 현상이었다.

성결운동 초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대표적 인물과 수단이 푀비 팔머 여사와 소그룹모임 성격의 화요집회라고 한다면, 남북전쟁 이후 성결운동가들이 침체된 성결운동의 회복과 확대를 도모한 수단은 대규모 캠프집회였다. 캠프집회의 강력하고 광범위한 영향력으로 성결론이 퀘이커교도, 침례교도, 장교교인, 회중교인을 포함하여 초교파적 추종자들을 얻게 되자, 웨슬리의 성결론을 수용한 타교파 신자들 중 감리교도가 되기를 원하는 경우가 속출하였다. 그들은 교단적 배경은 달랐지만, 성결의 진리를 믿어 진정한 웨슬리의 후예들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감리교 전반의 체질은 여전히 세속화와 교권화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불거진 문제가 바로 초교파적 성결 회심자들이 감리교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성결운동이 끝까지 감리교에 남아 내부개혁운동을 지속할 것을 주장한 이들과, 감리교회로부터 나와 새로운 성결교단을 만든 이들로 구분되게 되었다. 때로는 감리교회에 남기를 원하였으나, 성결을 강조하는 새로운 감리교도들을 반기지 않는 기존 감리교도들에 의해 교회로부터 강제로 내쫓긴 감리교도들도 새로운 성결교단들을 형성하였다.

감리교로부터 스스로 나왔거나 추방된 이들이 만든 수십 개의 성결교단들은 교리적, 지역적, 인종적, 사회적, 계층적 이유 등 다양한 이유에 의해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점차 공고한 교단들로 연합되었다. 그러나, 챨스 E. 존스가 바르게 분석한 대로, 어떤 성결교단의 생각 속에든 “성결운동에서의 최고의 권위”는, 각각의 교단들을 형성한 이들보다, 운동의 원 뿌리인 존 웨슬리에게 있다는 이면적 공감대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성결운동 그룹들의 교단화가 필요했던 이유로는, 감리교단이라고 하는 외부적 문제 뿐만 아니라, 성결운동 자체의 필요에도 있었다.

하워드 스나이더의 분석에 의하면, 18세기 웨슬리가 가르친 성결을 회복하기 위해 19세기 성결운동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성결운동은 웨슬리의 운동에 비해 대체로 두 가지 약점을 지니게 되었다. 첫째,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결에 소그룹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함을 인식한 데 비해, 성결운동은 소그룹 안에서의 친밀하고, 지속적이며, 강도 높은 영적 훈련 체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대규모 캠프집회가 서서히 소그룹 모임을 대신함으로써,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기를 훈련하는 것이, 집회에 참석하여 감정적 경험을 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성결운동 초기에는 푀비 팔머의 화요 집회 같은 소그룹 모임이 성결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한다면, 캠프집회에 치중한 후로는 성결운동에 힘과 지속성을 부여하던 주요한 은혜의 수단이 상실되었다. 둘째로, 성결집회가 지속적 훈련이 상실되고 단기간의 집회로 변형된 것과 관련된 사항으로, 웨슬리는 순간적 경험으로서의 성결과 그 전후 은혜 안에서의 점진적 성장 과정을 함께 강조한 것에 비하여, 성결운동의 강조점은 자연히 캠프집회 동안 거듭난 신자들의 제2차적, 순간적 경험으로서 성결체험에 더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었다. 웨슬리는 성결이 순간의 황홀경적 경험으로 축소되어 광신주의로 타락하는 것을 막고자 성결을 기독론적 변화 및 성령의 열매, 구원론에서의 은총의 연결고리 등 조직신학적 전체성 속에 위치시키고자 노력한 데 비해, 19세기 성결운동은 성령론에 집중하는 특징을 나타내었다. 멜빈 디이터는 “성결운동이 구원의 특정한 순간을 강조하면서 지속적 성장에 관한 강조가 약화”되었음을 인정한다. 웨슬리가 강조한 지속적인 돌봄을 위한 소그룹 공동체가 없는, 대규모 집회만으로는, 순간적 체험으로서 성결 강조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성결 전후의 지속적인 성장이 어렵다는 점에서, 성결운동 그룹들의 교단화에 대한 필요와 움직임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19세기 성결운동가들 중 신유를 믿고 가르친 사람들은, 성결교리에서는 주로 웨슬리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과는 달리, 더 넓은 신유운동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 이후의 경건주의자들과, 18세기 존 웨슬리, 19세기 미국의 제2차 대각성운동의 지도자들 및 영국과 미국의 성결운동가들, 그리고 전문적인 신유운동가들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종교개혁자들의 은사중지론을 실천적, 목회적으로 극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원론, 종말론, 은사론 등 다양한 신학적 관점에서 신유에 대한 믿음을 확대하였다. 19세기는 개신교회들이 교파의 구분을 초월하여 신유라는 은혜를 재발견하고 누린 시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보다 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19세기 이후 신유운동이 초교파적인 현상이 된 데는,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중세 가톨릭교회 및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의 은사중지론을 신학적, 실천적으로 극복한 것이 가장 크고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18세기 웨슬리의 부흥운동 및 19세기 성결운동의 지도자들은, 성결의 회복이 초대교회에 풍성하게 나타났던 성경적 은사 회복의 비결이라는 웨슬리의 가르침을 입증하면서, 신유의 은사가 초교파적 축복이 되게 하는 게 실제적으로 공헌한 것이다.

종말론에 있어서는, 19세기 성결운동 그룹들이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19세기 전반, 미국 사회는 엄청난 확장의 시기였다. 미국의 영역이 확장되고 인구가 늘어나고 막대한 부가 창출되고 새로운 발명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신앙적으로도 제1-2차 대각성운동 등 대부흥이 미국 전체를 휩쓸었고,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죄와 불의를 공격했고, 선교사들은 세상 끝으로 나아갔다. 성경이 말씀하는 평화와 정의의 시대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었고, 후천년설적 종말론이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를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부흥사들과 성결운동가들은 낙관적이고 후천년주의적 종말론을 가르쳤다.

그러나, 남북전쟁(1861-65) 이후 미국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도시화와 세속화, 급속한 산업화와 소수에로의 부의 집중, 현대과학에 의한 성경적 세계관 부정, 이민자들에 의한 미국 종교의 다원화 등은 개신교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지적 지배력을 약화시켰다. 이전의 낙관주의는 약화되고, 미국 개신교인들은 미래를 불안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개신교인들 사이에는 새로운 형태의 종말론적 사고로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유행하게 되었다. 영국의 존 넬슨 다비(1800-1882)의 주장을 드와이트 무디, A.J. 고든 등 유명한 개신교 지도자들이 확산시켰다. 성결운동은 처음에는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고안된 이 새로운 전천년설이 웨슬리안 신학 및 성결운동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라 여겨 반대하였으나, 결국 영향을 받게 되었다. A.M. 힐쓰와 같이 후천년적 관점을 옹호하는 성결신학자들이 여전히 많았지만, 1930년 무렵까지는 전국성결연맹의 성결부흥사 조지 왓슨, 만국성결연맹의 마틴 냅(1835-1901), 나사렛신학자 오튼 와일리 등 다양한 성결그룹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전천년설을 수용하게 되었다. 대체로 후천년설을 지지하던 성결운동 내에서 전천년설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급진파"(radical wing)로 불렸지만, 성결운동의 대의와 정체성을 형성한 교리는 종말론 자체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 예로서, 대표적 급진파 그룹인 만국성결연맹은, 자신들이 신유 및 전천년주의적 종말론을 강조한 이유가, 성결운동의 대의로서 "성결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임을 그 신조 속에 명기하였다. 동양선교회와 한국 성결교회 역시 "옛날 웨슬레씨"가 주장하던 교리를 재천명하려는 목적은 "성서적 성결을 받게 하며 복음이 땅끝까지 보급"되게 하려는 대의를 위한 것이며, 이를 위해 사중복음 강조를 강력한 실천적 방편으로 삼았음을 교리신조 또는 헌법에 명기하였다.

 

VII.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교부시대, 중세시대, 종교개혁시대, 웨슬리의 부흥운동 시대, 성결운동 시대에 사중복음이 각각 어떻게 이해되고 주장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사중복음의 시대적 흐름을 요약함으로써 논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중생과 성결의 교리는, 초대교회시대, 교부시대에 매우 강력하게 주장되고 또한 체험되었다. 중세 카톨릭교회에서는 교회의 세속화와 더불어 성화를 칭의의 조건으로 여기는 구원론 혼란이 일반적이었음에도, 성결에 대한 주장과 추구는 지속되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루터가 성경적 칭의론을 확립하였고, 칼빈은 중생을 칭의와 동일한 비중의 은혜로 강조하였으나, 교부시대와 중세 카톨릭 전통이 보존해온 성결을 부정하였다. 종교개혁 전통 속에서 체험적, 실천적 신앙과 은총의 수단으로 경건을 위한 소그룹 훈련을 강조한 경건주의를 통해 종교개혁신학의 정수와, 또한 영국국교회 전통에 녹아있는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 전통을 창조적으로 종합한 웨슬리는, 종교개혁적 은총관 위에서 중생 뿐만 아니라 성결이 가능함을 가르쳤다. 19세기 성결운동은 성결의 진리를 감리교의 범위를 뛰어넘어 초교파적으로 확산시켰으나, 은혜 안에서 점진적 성장 및 이를 위한 소그룹 안에서의 지속적 영적 훈련에 대한 강조가 약화된 측면이 있었다.

신유에 대해서는 초대교회로부터 교부시대에 이르기까지 체험적 증언이 넘쳐났다. 그러나, 로마의 기독교 공인과 중세 카톨릭 교회의 세속화 이후 신유의 증언은 줄어든 대신, 미신적이거나 꾸며낸 이야기들이 넘쳐났고 중세 카톨릭의 대표적인 신학자 아퀴나스에 의해 은사중지론이 주장되었다. 루터, 칼빈과 같은 개신교 종교개혁자들 역시 은사중지론을 주장하였으나, 경건주의자들과 웨슬리에게서 은사중지론은 체험적, 목회적, 신학적으로 극복되었다. 이후 미국의 대각성운동 및 영국과 미국의 성결운동 등에서 신유에 대한 강조와 신학적 뒷받침이 이루어졌다.

종말론은 초대교회 이후로 두 갈래의 흐름을 형성해왔다. 교부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렸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지상에서 이루어질 미래적 천년왕국이 종말론적 기대의 핵심에 있었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과 중세 카톨릭의 번영으로 인해 현세적 교회가 중심이 되는 무천년설적 혹은 후천년설적 천년왕국 이해가 발전하였고, 이것이 중세시대와 종교개혁시대에까지 종말론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였다. 그럼에도 중세 카톨릭의 요아킴이나, 종교개혁시대의 급진적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19세기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일부 성결운동 그룹은, 초대교회로부터 교부시대를 거쳐 교회사의 면면을 이어온 전천년설적 종말론을 계승하였다.

교리사에서 사중복음에 대한 논의는, 중생과 성결에 관하여는, 중생과 성결을 칭의의 조건으로 보아야 하는지, 그 열매로 보아야 하는지? 칭의의 은혜와 중생(성결)의 은혜 중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지? 성결이 무엇이며 그것이 가능한지? 등의 질문에 대해 이루어졌고, 각 시대의 신학적 전통들이 저마다의 답변을 내놓았음을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초대교회에서 강력했던 중생과 성결의 진리와 체험들이, 중세시대에는 구원론 혼란에 의해 방해 받았고, 그 이후에는 성결의 가능성을 부정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의해 방해를 받았지만, 웨슬리와 성결운동에 의해 다시 회복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신유에 대한 논의에서는, 신유가 오늘날에도 지속되는지의 질문에 대해, 사도시대를 끝으로 종결되었다는 입장과, 신유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성결의 상실로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입장이 대립하였음을 볼 수 있었다. 중세시대와 종교개혁시대에는 은사중지론이 많은 호응을 얻었다면, 그 이후 경건주의자들과, 웨슬리, 부흥운동가들과 성결운동가들은 믿음 또는 성결의 상실이 은사가 희귀해진 원인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재림에 대해 어떤 견해를 취하느냐는, 시대적 환경이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볼 수 있다. 전천년설은 시대가 불안하고 미래가 불확실 때, 무천년설 혹은 후천년설은 교회가 부흥하고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미래가 낙관적일 때 주로 확산되어 왔다. 비관적 역사관의 전천년설은 강한 종말론적 기대라는 장점과 역사에 대한 책임적 참여를 약화시킬 위험성을, 낙관적 역사관의 후천년설 혹은 무천년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진전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치도록 철저한 헌신을 촉구하는 장점과, 하나님 주권에 대한 의존 및 임박한 종말신앙을 약화시킬 위험성을 내포한 채, 오늘날에도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출처 : 서울신학대학교 글로벌사중복음연구소 엮음, 『글로벌신학과 사중복음』, 5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