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성결 신학 : 성경적 신앙과 실천 회복의 토대

"성결복음 학술제"(2022, 6, 30 신촌성결교회) 발표 내용입니다.

출처 : 장기영 페이스 북

img1.gif

 

많은 신학자들은 한국 개신교 타락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 비성경적 신학임을 한 목소리로 지적한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신학자 김세윤은 한국 개신교 타락은 개신교인들이 “구원파적 복음”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김영한은 한국 개신교가 “죄인의 칭의가 아닌 죄의 칭의“를 말하는 오류에 빠졌다고 평가하며, 침례교 학자 신광은은 한국 개신교인들이 소위 ”아르뱅주의“ 신학 곧 죄인의 구미에 맞게 신학 이론을 뒤섞어 성화를 제거한 값싼 구원론에 빠져있다고 분석한다.

이들의 진단은 개신교 타락 저변에 숨겨진 신학의 문제를 바르게 드러내고 있으나, 매우 아쉬운 것은 그들 중 누구도 개신교 타락에 영향을 끼치는 비성경적 주장이 개신교 신학의 토대인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의 신학 자체에 내재돼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한다는 데 있다. 국내에서 종교개혁 신학은 그 한계와 오류를 언급해서는 안 될 금단의 영역과 성역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기독교의 무능하게 하는 원인에는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훼손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잘못된 가르침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일평생 그 오류를 바로잡아 성경적 개신교 신학을 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종교개혁 신학의 많은 부분을 계승하는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이자 동시에 그 속에 포함된 많은 오류를 수정, 보완해 개신교 신학을 성경적 신학으로 회복시킨 종교개혁 신학의 완성자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한국 개신교 타락의 원인을 성경적 성결 신학의 부재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되, 특히 종교개혁 신학에 기독교를 무능하게 하는 어떤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지 살펴보고, 웨슬리의 성결 신학에 이를 바로잡아 성경적 신앙과 실천을 회복할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I. 종교개혁 신학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펠라기우스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신학, 구원자가 아닌 심판자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지옥의 공포만 부추긴 로마 가톨릭교회 아래서 그들이 가르친 방법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큰 좌절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의 고해 신부 슈타우피츠의 권면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신학교수직을 맡아 1513년 시편 강의, 1515년 로마서 강의, 1516-17년 갈라디아서 강의를 맡아 성경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의 진리를 발견했다. 로마 가톨릭의 펠라기우스적, 율법주의적, 인간중심적 종교에 반대해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는,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등 종교개혁 모토가 잘 나타나듯, 기독교를 다시 하나님의 은혜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 믿음 중심, 성경 중심, 한마디로 신중심적 기독교로 회복시키고자 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 사이에서 인간 편 극단에 치우친 로마 가톨릭교회를 바로잡기 위한 루터의 전략은, 그들과는 정반대편 극단인 하나님 중심의 극단성으로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터의 신학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실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히 선을 긋고 수용과 배제를 명확히 하는 흑백논리와 배타적 양자택일, 선명함과 확고함을 특징으로 한다. 루터는 이전의 어떤 신학자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만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충분성을 명확하게 주장했고, 그의 모든 글은 확고한 신념, 사고의 선명함과 탁월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톨릭의 인간중심적 극단성을 바로잡기 위해 루터가 선을 긋고 반대, 배제, 배척한 요소에는 사실상 가톨릭의 오류에 해당되지 않는 성경의 본래적 계시와 교훈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이 가톨릭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종교개혁 신학이 또 다른 오류에 빠져 성경을 균형 있고 조화롭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개신교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를 낳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 개신교인이 “구원파적 복음” “죄인의 칭의가 아닌 죄의 칭의” “아르뱅주의”에 빠지게 하는 근원은, 종교개혁 신학에 대한 오해나 잘못된 해석이 아니라, 사실상 종교개혁 신학 자체에 내포된 비성경적 주장이다. 종교개혁 신학은 가톨릭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반대되는 어떤 극단성과 비성경적 주장을 내포했기에, 그것이 지금 한국 개신교를 “죄짓는 기독교”로 타락시키는 근원이 되고 있는가? 지금부터는 먼저 종교개혁 신학의 조직신학적 체계을 살펴본 후, 다음으로는 그 한계와 오류를 분석보고자 한다.

1. 율법관

율법이 인간에게 허용된 영역과 허용되지 않는 영역을 구분하는 울타리라면, 죄는 허용된 영역에서 살아야 할 인간이 울타리를 넘어 금지된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심지어 가장 거룩한 신자라도 넘어서는 안 될 울타리를 넘어 금지된 영역에서 살고 있는 죄인이다. 그로 인해 “율법은 항상 정죄한다.” 율법은 결코 인간이 스스로의 의로움을 입증하거나 구원의 공로를 쌓는 방법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의 죄인 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심판이 마땅함을 알려준다.

2. 신론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듯 죄인을 의롭게, 가난한 자를 부하게,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또는 그 반대로 행하신다.

죄인의 구원의 원천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다. “자신을 만족시키는 대상에 의해 생겨나는” 인간의 사랑(헬라적인 획득적 사랑 Eros, 히브리적인 공로적 사랑 Nomos)과 달리, 하나님의 사랑은 “그 기뻐하는 대상을 창조한다.” “죄인은 사랑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에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이 선행과 공로로 하나님께 올라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향적 사랑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하나님을 대하는 인간의 바른 자세는 하나님을 의존하고 신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종교개혁 신학의 주장은 이중예정론이다. 즉, 하나님은 창세 전, 인간의 선과 악, 신앙과 불신앙조차 고려함 없이 전적으로 그분의 뜻으로만 선택하거나 유기하셨다고 주장해, 인간의 행위에 의한 공로사상이 구원에 개입되지 못하게 했다.

3. 기독론

결혼을 하면 신랑의 것은 신부의 것, 신부의 것은 신랑의 것이 되듯, 신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하면, 신자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모든 의는 신자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구원은 선행과 공로가 아닌,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행복한 교환” 또는 이중전가로 가능하다. 신자라도 죄인인 이상, 성화 역시 신자 자신의 불완전한 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로만 가능하다.

4. 성령론

성령의 도움 없이는 죄인은 율법과 복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한 채 율법을 자신을 변호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도구로 여길 뿐이다. 또 예수님을 단지 본받고 싶은 훌륭한 사람으로만 여긴다. 오직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만 율법은 죄인을 깨뜨리는 천둥 번개와 쇠망치가 되고,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된다.

성화에서의 성령의 사역도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은 여전히 죄인이기에 율법의 정죄와 불안, 공포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신자에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일깨워 주심으로 위로하신다. 이처럼 종교개혁 신학에서 칭의와 성화 모두는 신자의 노력과 행위가 아니라,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도우시고 복음으로 위로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5. 구원론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신앙은 우리의 지성, 감성, 의지, 즉 인격 전체의 변화를 가져오고,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성취, “육이 죽고 영이 사는 것, 세상과 육체와 지옥을 이김” 등 구원에 속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구원과 변화된 삶 모두가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것을 하신다는 뜻이다.

인간의 행위는 불완전할 뿐이다. 로마서 13장 10절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말씀한다 해서, 사람이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약하고 죄로 오염된 인간의 사랑은 사람을 의롭게 할 만큼 순수하지도, 충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구원은 은혜에 의해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6. 인간론

인간은 전적 타락한 존재다. 즉, “(1) 모든 사람이 죄로 가득하고, (2) 사람 속에는 죄로 오염되지 않은 부분이 없으며, (3) 죄는 인간을 사탄의 지배 아래 종속시켰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의 노예 된 존재다.

심지어 신자라도 이 상태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신자는 (1)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이지만 자신의 본성으로는 죄인일 뿐이다. (2) 미래에 의롭다 하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르면 의롭지만, 실제로는 죄가 가득하다. (3) 성령이 신자의 의지를 다스릴 때는 의롭지만, 자신의 의지로는 죄의 노예일 뿐이다. 따라서 신자의 의로움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가능할 뿐, 신자 자신의 상태로는 죄의 노예일 뿐이다.

이처럼 구원받은 신자도 늘 죄인이어서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주된 장소는 양심이다. 율법의 정죄로 인한 불안과 심판의 두려움에서 평안을 얻는 방법은, 성령께서 죄 용서의 사실을 지속적으로 일깨워 주시는 방법밖에 없다.

 

II. 종교개혁 신학이 개신교에 끼친 부정적 영향

1. 부정적 율법관이 율법폐기론을 초래함

루터는 중세 가톨릭의 율법주의를 바로잡기 위해 율법과 복음을 구분한 후, 율법의 역할은 정죄에 한정하고, 복음의 역할을 용서로 설명했다. 또 타락 후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심지어 가장 거룩한 신자라도, 율법을 어긴 죄인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율법은 신자라도 언제나 정죄할 수밖에 없다.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가치의 우열로도 구분했다. 비록 율법은 죄인으로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더라도, 정죄할 뿐 해결책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율법과 복음의 부정적, 긍정적 역할 구분이 가치의 우열로도 이어진 것이다. 그 예로, 루터는 “신약성경에 붙이는 서문”(1522)에서 “야고보서는 참으로 지푸라기 서신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복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라며 평가절하했고, “야고보서 서문”(1522)에서는 야고보서가 행위 구원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면서 그 정경성을 부인했다. 1532년 『탁상담화』에서는 “믿음이 의롭게 한다는 바울 서신과 행위가 있어야 의롭게 된다는 야고보서는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말했고, 1540년에는 “교황주의자들만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야고보서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사도의 글일 수 없다. 나는 언젠가 야고보서를 불쏘시개로 사용할 것이다”라는 극단적 평가를 내린다. 1542년에는 “우리 비텐베르크 대학은 야고보서를 추방해야 한다”, 1543년에는 “우리 비텐베르크 대학은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빼버렸다”고 말했으며, 그는 실제로도 야고보서를 구약 외경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루터는 특히 종교개혁 초기에 율법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앙을 통해 모든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은 모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1525)라는 설교에서는 “우리는 모세의 명령을 따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세는 죽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의 다스림은 끝났고, 그는 이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십계명도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라고도 주장했다.

루터는 설교자가 율법을 설교할 때 “율법의 뜻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면서”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담대하게” 설교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자신의 실제 설교는 율법과 복음의 적절한 균형을 보여주지 못했고, 언제나 복음에 치우쳐 복음을 더 강하게 처방하곤 했다.

루터의 의도는 당시에 지배적인 사상이었던 가톨릭의 율법주의에 대항해 구원의 능력이 복음에만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었지만, 율법의 역할을 정죄에 한정하고 그 가치를 폄하하며 신자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다는 지나친 주장까지 나아간 것은, 이후 개신교인들이 율법폐기론적 성향을 띠게 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결국 루터의 추종자 중 요한 아그리콜라는 “여러분이 신앙만 가지고 있다면 죄 속에서도 거룩하다” “죄를 지어도 행복해 하라. 죄는 신자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여러분이 매춘부, 불량배, 간음자라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 “신자는 죄에 깊이 빠져도 여전히 축복 속에 있다”는 등의 율법폐기론적 주장을 하게 되었는데, 유사한 생각과 주장은 오늘날의 많은 개신교인 사이에 만연해 있다. 한국 개신교인에게서 볼 수 있는 “구원파적 복음” “죄인의 칭의가 아닌 죄의 칭의”, 죄인의 구미에 맞게 신학 이론을 뒤섞어 성화를 제거한 값싼 구원론의 문제는 그보다 먼저 루터 추종자들에게서 존재한 것이다. 비록 루터 학자들은 아그리콜라의 율법폐기론은 루터를 왜곡한 것이라고 비난하지만, 루터가 율법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평가절하한 것이 그런 율법폐기론적 왜곡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칼빈은 율법의 제3용법, 곧 신자에게 거룩함의 길을 지시하는 용법을 추가해 율법의 긍정적 역할을 말했으나, 그 역시 신자라도 죄인이기에 율법을 온전히 성취할 수 없다는 부정적 주장에서는 루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2. 신론: 이중예정론과 연결된 교리들은 거룩함을 소멸시킴

종교개혁 신학은 가톨릭의 인간 중심적 종교에 대항하기 위해 구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이라는 생각을 철저히 거부하고 하나님의 전적 주권을 강조했다. 특히 두드러지게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자족성(all-sufficiency), 곧 하나님은 모든 일의 결정짓는 원리를 그분 안에 가지고 계시므로, 선택과 유기의 결정에서 인간의 죄나 선행, 불신앙이나 신앙에 영향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족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주장은 이중예정론에서 나타난다.

종교개혁자들이 이중예정론을 가르친 의도는 자기 의를 내세워 하나님의 은혜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인간의 교만과 배은망덕, 자기 우상화를 꺾으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듯 보이는 회개와 믿음, 선행과 거룩한 삶 모두가 실은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못 박을 때, 인간의 자기 우상화는 좌절되고 영광이 하나님께만 돌아간다고 본 것이다. 이중예정론은 한마디로 공로사상의 토대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종교개혁자들의 무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중예정론은 신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도 변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상태로 고통을 당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는 그리스 철학의 신의 무감성(impassibility) 개념을 차용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성경이 계시하는 거룩한 사랑의 속성(겔 18:32; 벧후 3:9; 딤전 2:4)과 충돌하는 방식으로 왜곡해, 마치 하나님이 인간의 멸망에서 기쁨을 찾는 악한 하나님인 것처럼 잘못된 주장을 하게 되었다. 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일하시는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을 성부 아래 종속시켜, 성부의 유기의 결정에 대해 안타까워만 할 뿐 유기된 자들을 위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 만들었다(요 5:40; 마 23:37).

나아가 하나님에 의해 사람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논리는, 신자에게서 장래의 상급을 바라고 심판을 피하기 위해 거룩함을 추구하려는 동기를 파괴하고, 거룩함을 따를 이유 자체를 소멸시킨다. 또 단지 하나님만 무감성의 존재로 여기는 오류에 그치지 않고 신자 역시 그렇게 만들어, 수없이 많은 사람이 영원한 지옥으로 유기되는 것을 마음 아파하기보다 마땅히 여기고, 자연히 그들을 경멸하는 마음과 냉담함을 갖게 한다. 그들에게는 선을 행해도 소용이 없기에 온유함, 인내, 오래 참음으로 대할 필요가 없으며, 전도나 구제를 할 가치가 없으며, 심지어 지옥형벌을 당해도 마땅하다는 잔인한 태도를 정당하고 의로운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중예정론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 쉬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과는 달리, 선민임을 자처하면서 이방인을 경멸하고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헌신한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했던 유대인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무자비함을 신자에게 일으킨다.

실제로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기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부와 많은 사람의 빈곤의 원인을 하나님의 예정으로 돌렸다.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 부강한 나라와 빈곤한 나라 간의 차이, 심지어 백인과 흑인의 차별과 노예제도마저 하나님의 뜻으로 돌려 끔찍한 죄악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모면하는 도구로 예정론을 악용하기도 했다.

이중예정론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과 충돌하고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만든다면, 이중예정론의 논리적 귀결인 성도의 견인 교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과 충돌하며 성도들을 죄에 무뎌지게 한다.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는 논리적으로 이미 완성된 구원, 영원한 구원 보장, 성도의 견인 교리로도 이어져, 신자가 짓는 죄는 영생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잘못된 사고를 낳는다. 리처드 S. 테일러는 칼빈주의자들 중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많음을 인정하면서도 이중예정론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자들이 다음과 같은 잘못된 성향으로 기울어는 자연적인 성향을 지닌다고 말한다.

1. 칼빈주의는 신앙은 강조하면서 회개의 필요성은 매우 경시하는 경향을 지닌다.

2. 칼빈주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을 잃게 만든다. 다니엘 스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인 교사가 죄에 관대해지라고 유창하게 말하고, 내재하는 죄에 대해 오류가 있는 독창적인 성경 해석을 내세우는 것은 매우 나쁜 징조다. 신자가 몸에 거하는 한, 그런 설교는 죄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 죄의 무서운 성격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하고, 사람들을 ‘마치 자기 얼굴에 있는 주근깨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들 마음의 더러운 것을 대수롭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말하게’ 만들 것이다.”

3. 칼빈주의는 그 추종자들이 삶에서 어느 정도의 죄를 허용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4. 칼빈주의는 필시 타락한 사람들을 안심시켜 잘못된 구원 보장 교리 속에서 잠들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타락한 사실이 명확해진 후에 칼빈주의 교리를 주장해 이런 식의 조장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5. 칼빈주의는 모든 죄에서 온전히 씻음 받는 성결의 교리에 본성적으로 반대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만약 자범죄가 천국을 잃어버리게 하지 않는다면, 타고난 죄에서 정결하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아가 자범죄의 끔찍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정결한 마음을 깊이 갈망하지도 않는 경향이 있다.

3. 기독론: 의의 전가 교리로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킴

종교개혁 신학은 구원자 그리스도의의 사역을 설명할 때 삼중직분(예언자, 제사장 왕) 중 주로 제사장 직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중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행복한 교환”이나 “이중 전가”와 같은 그리스도의 의의 이중적 전가라는 관점으로 설명했다. 즉,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의(율법에 대한 완벽한 순종)와 수동적인 의(십자가를 통한 죄 용서) 모두가 전가된다는 것이다. 또 수동적인 의의 전가를 해석할 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의 용서로 설명한다. 이는 신자는 믿는 순간 모든 죄, 심지어 미래의 죄까지 단번에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까지 신자 자신의 순종으로 여겨진다는 것으로, 신자에게서 회개의 필요성을 제거할 뿐 아니라, 신자 자신의 순종과 거룩함의 필요성을 제거한다. 존 플레처는 칼빈주의식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가 신자에게 일으키는 율법폐기론적 사고방식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복음은 그들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외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 곧 믿음을 가진 죄인인 양, ‘주님이 모든 것을 다 하셔야 한다. 회개와 신앙은 그분의 사역이고, 그분의 권능의 날에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버젓이 세상의 헛된 것과 육체의 정욕의 풍조를 따른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롬 8:13)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더 잘 안다. 복음에는 어떤 ‘만약’도, 조건도 없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이라고? 우리를 생명을 얻기 위해 달리고 일하게 만들겠다고? 당신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믿으라고 말하지 않고, 언제까지 율법에 매여 행하라는 말을 반복할 것인가?’라고 말한다. …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 더하라 …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5-10)고 명령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주의 같은 소리를 하다니! 약속은 언제나 굳건하고 확실하다. 우리의 덕이 우리를 구원하지도, 우리의 죄가 우리를 저주하지도 못한다’고 주장한다. 사도 요한 역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라고! 당신은 사람이 오늘은 하나님의 자녀였다 내일은 마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말로 우리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로 만들려 하는가?’라고 말한다. 유다는 논의를 종결지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유 1:21)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그들은 태만하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다’고 답한다. 또 ‘그런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우리는 안전하다’고 말한다.”

의의 전가 교리는 오늘날의 개신교인에게 여전히 개신교식 면죄부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내가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모든 개인적 순종이 나의 것이 되었는데 거기에 무엇을 더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태만과 방종에 이르게 하고 있다.

4. 성령론: 성령의 계시는 중시하나 오순절적 성결과 초자연적 은사를 부인함

종교개혁 신학은 성령께서 율법과 복음을 계시하심으로 죄인의 구원이 가능함을 가르친다. 또한 믿음을 주시고 성도를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역사를 설명할 때는 매우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어서, 구원 받은 신자는 변화를 받아 율법에 순종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믿음은 열매를 맺고, 성령은 신자 안에서 죄와 육체를 이기시고 이미 용서 받은 죄로부터 신자를 정화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종교개혁 신학은 신자를 성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설명에서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다. 아무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화를 일으키는 것이 믿음과 성령이라 하더라도, 초점을 성령에서 신자에게로 옮기면, 신자는 여전히 죄인이기에 신자의 사랑과 순종은 불완전할 뿐 아니라 온전히 지속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매우 능력 있고 적극적인 것이 믿음의 열매와 성령의 역사라 하더라도, 믿음의 소유자인 신자 자신이 죄인이기에 신자 속에서 믿음은 죄의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고, 또 신자가 성령의 선물을 받더라도 여전히 죄인이기에 지속적이고 온전하게 성령을 좇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귀와 죄와 육체에 저항하고 성령으로 그것들을 억누르지만, 계속적인 승리를 얻을 수는 없기에 신자의 양심은 끊임없이 율법의 정죄를 받는다. 따라서 비록 성화가 성령에 의한 신자의 영적 갱신, 신자 속에 주어진 새 마음, 새 성품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성화에서 더 중요한 초점은 성령께서 우리가 “죄 용서” 받은 사실을 계속 일깨우신다는 데 주어진다. 종교개혁 신학에서는 신자를 성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신자에게서 죄의 현실은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개신교에서 오순절적 성령의 능력 부음은 주로 복음 전도의 능력, 성결의 능력, 성령의 은사라는 세 가지 관점으로 해석되어왔다. 종교개혁 신학은 성령의 능력 부음을 그중 첫 번째인 복음 전도의 능력과만 연결해, 신자가 받는 제2차적 은혜로서 성령세례(성결, 그리스도인의 완전)를 부인하고, 또 은사중지론으로 초자연적 은사들 역시 부인한다. 종교개혁 신학에서는 신자가 제2차적 은혜(second blessing)를 통해 성령의 온전한 충만함을 누리는 것이나, 성령의 풍부한 초자연적 은사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신자는 여전히 죄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다.

5. 구원론: 칭의는 강조하면서도 성화를 약화시켜 신자를 죄의 종으로 묶어 둠

중세 가톨릭의 공로사상은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력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 중심적 구원론으로, 그 속에는 경건과 선행이라는 자기 의를 내세워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꾀하려는 죄인의 교만이 숨어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이를 간파했기에, 공로사상에 담긴 내면적 죄악을 공격하고, 오직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신학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은 인간이 공로사상과 자력구원이라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 신자가 죄를 벗어날 수 없게 하셨다는 잘못된 주장에까지 나아갔다. 루터는 “성령께서는 때때로 그리스도인으로 타락하고 실수하며 넘어지고 죄짓게 하신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우리가 마치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해진 것처럼 자기만족에 빠지는 것을 막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와 거룩함의 원천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오만과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계속 자신의 죄를 자각할 때라야 하나님은 계속 “두려움과 경외, 예배의 대상”이 되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만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해 그들을 죄 아래 가두어 두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죄는 죄에 의해서 제거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어느 정도까지 인간을 버리시기도 하신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죄를 지을 필요가 있다.’ 사탄의 활동이 사탄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 죄는 죄에 의해 치료를 받는다. 독은 독으로 치료할 수 있다. 불은 불로 끌 수 있다”고 언급한 어거스틴의 주장, 또 “하나님은 악을 의도하실 뿐 아니라 악의 원인이 되시기도 한다”는 칼빈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교만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 죄에 빠지게 하신다는 주장은, 이 세상에서는 성결이 불가능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를 죄짓게 하심으로 그들을 겸손케 하시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주장은,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라는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잘못된 주장이다. 또 이는 하나님께서 신자로 겸손히 낮아져 하나님의 은혜에 굴복하게 하시기 위해, 그들로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불순종의 죄에 빠지게 하신다는 해괴한 주장이다. 이는 달리 말해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해 죄를 짓는 불순종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수용하는 겸손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된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순종하며 범죄하지 않는 자는 필시 교만해져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괴이한 인과관계를 주장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을 존중해 순종하는 자는 교만에 빠질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순종을 저지르면 겸손케 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과연 수용 가능한 성경적 가르침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죄에 머물러 두게 하신다는 종교개혁 신학의 잘못된 주장은 오늘날까지 많은 개신교인에게 영향을 끼쳐, 성결을 부정하고, 심지어 성결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게 만드는 영적 독소가 되고 있다.

6. 인간론: 신자를 ‘의인이자 죄인’ 또는 ‘두 본성’의 상태로 묘사해 성결을 부정함

종교개혁 신학은 공로사상의 토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의 자족성과 이중예정론을 주장한 것과 조화를 이루도록 구원 문제에서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함을 주장하기 위해 인간의 의지는 죄와 사탄 또는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노예의지론’을 가르쳤다. 믿음도, 순종도, 구원으로의 어떤 결정도 하나님에 의한 것이지 타락한 인간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노예의지론은, 죄인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하는 목적에서는 탁월한 방법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구원의 영광만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구원 받지 못하는 원인, 불신앙, 죄와 영원한 멸망의 원인까지 하나님께 돌린다는 데 있다.

이처럼 인간을 한없이 수동적이고 무능한 존재로 묶어둔 것이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은 한국 개신교인의 신앙 양태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신광은 박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한국 개신교인들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은 구원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능하며 어떤 공로도 세울 수 없다는 칼빈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을 “구원을 위해서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변질시킬 뿐 아니라, 자신의 윤리적 실패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한다.

종교개혁 신학은 심지어 구원받은 신자의 상태조차 ‘의인이자 죄인’ 또는 ‘두 본성’이라는 ‘동시적 특성’과 세상에서 신자 자신의 의는 시작되지만 완성될 수 없다는 ‘불완전성’으로 설명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전케 하실 것이라고 하신 약속에 근거해 종말론적 완성의 희망을 말하지만, 신자의 현재의 상태는 죄를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신자의 상태에 대한 이런 묘사는 단지 신자라도 죄는 어쩔 수 없다는 영적 패배주의를 심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성결에 대한 반대에까지 나아간다. 신자는 여전히 죄가 많기 때문에, 신자 자신의 변화로서의 성결을 강조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위선이나 낙심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루터, 칼빈 전통에 속한 어떤 학자, 목회자도 잘 언급하지 않는, 종교개혁 신학의 극단성이 개신교 신학에 초래한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의 대중적 왜곡, 죄에 대한 패배주의, 율법폐기론적 경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주장들을 내포한 종교개혁 신학이 성경적 성결론을 바르게 가르쳐 사람들을 적극적 성결 추구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교회사가 필립 샤프는 그 영향은 개신교인들에게 즉시 나타나 “루터 스스로가 후년에 복음의 자유의 오용 및 비텐베르크와 작센 지방 전체에 걸친 개탄할 만한 도덕적 상태에 대해 자주 쓰라린 불만을 터뜨렸을” 정도로, 루터의 종교개혁에는 “반(反)율법주의적 경향과 공중 도덕의 퇴보가 수반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루터 학자 최주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려고 일어선 종교개혁 진영은 엉뚱한 복병을 만나게 된다.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개신교 진영 내부에서는 밑도 끝도 없는 방종과 무식함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개혁자들의 구호인 ‘복음의 자유’를 빌미로 집 안에서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것이다. … 개혁자들은 복음의 자유, 해방, 모든 신자의 평등한 만인사제직을 핵심 가치로 주장했지만, 현 장에서는 교리의 오해와 오용으로 이어졌고, 왜곡된 ‘복음의 자유’로 인해 율법 기능은 철폐되어 세상 권위와 질서는 무시해도 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로 인해 개신교 성직자들의 부패와 게으름, 교리에 대한 무지가 만연했고, 도저히 성직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도덕적 해이와 방종의 사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목사들의 사정이 이러한데 일반 신자들은 오죽했을까? 목회자든 일반 신자든 가릴 것 없이 신앙과 삶의 규칙은 엉망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 … 성직자와 일반 신자들은 모든 제약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 꼴이 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교회의 징계를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종교개혁으로부터 두 세기가 지난 뒤 영국의 존 웨슬리는 “교회에는 세례받은 밥버러지, 세례받은 술주정뱅이, 세례받은 거짓말쟁이, 욕쟁이, 험담꾼, 세례받은 오입쟁이, 도둑, 착취자가 얼마나 많은가?”라며 한탄했다. 가톨릭의 신학과 실천의 타락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난 개신교인이 상습적으로 죄를 지으면서 “지옥이 천국에서 먼 만큼이나 거룩함과 거리가 멀고”, 기독교 국가, 도시, 교회, 가정, 성도들에게서 셀 수 없는 악행이 일상화된 것을 목격한 것이다.

성경은 사탄이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후 11:14)고 말씀한다. 이런 일은 신학에서도 일어나는데, 사탄이 신학으로 장난을 치면, 신자가 짓는 죄는 구원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궤변(롬 6:1, 15)이 성행하게 된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유1:4) 것이라고 말씀한다. 종교개혁 신학의 극단성에서 비롯되어, 하나님 은혜를 인간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에 문제없다는 태만과 방종의 허가로 변질시킨 신학은, 오늘날 한국에서도 복음의 신뢰도를 추락시키고 사회 속에 교회가 존립할 이유를 의심받게 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종교개혁 신학의 한계와 약점으로 인해, 개신교를 성경적 균형과 조화로 회복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 웨슬리 신학이라 할 수 있다.

 

III. 존 웨슬리의 신학

웨슬리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두 세기 이후의 사람으로,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 신학의 강조점을 물려받으면서도, 동시에 종교개혁 신학의 신중심적 극단성과 율법에 대한 부정적 이해로 인해 태만과 방종에 빠진 개신교회를 성경적 거룩함으로, 신중심적 극단성을 띠게 된 개신교 신학을 성경적 균형과 조화로 회복시키고자 노력했다. 웨슬리 신학은 역사 속 다양한 기독교 전통에 각기 흩어져 존재하던 성경적 진리의 파편들을 녹여 창조적으로 종합해 루터가 터부시하고 배제해버린 성경적 진리의 중요한 요소를 개신교 신학 내에 다시 회복시키는 성경적 균형을 특징으로 한다.

1. 율법관

웨슬리 역시 루터처럼 율법을 허용된 영역과 허용되지 않는 영역을 구분하는 울타리로, 죄를 허용된 영역에서 살아야 할 인간이 울타리를 넘어 금지된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보았다. 또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넘어서는 안 될 울타리를 넘어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영역에서 살고 있는 죄인이기에 율법의 첫 번째 기능은 죄인을 정죄함으로 구원의 필요성을 일깨운다는 루터의 가르침에 웨슬리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죄인을 정죄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의 전부인가? 만약 구원이 없다면 “율법은 항상 정죄한다”는 주장은 언제나 옳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구원받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고자 하는 변화된 본성을 주신다. 웨슬리는 이를 달리 표현해,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죄 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을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으로 알게 되는 순간, 하나님의 법이 그의 마음에 새겨진다. 그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신다”고도 표현했다. 하나님께서 신자의 마음에 율법을 새기신다는 것은, 과거에 주시지 않았던 새로운 율법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신자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의 죄 된 본성과는 맞지 않는 이질적인 것으로 경험한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고 죄인은 율법을 혐오해 율법과 죄인 사이에는 반목과 적개심이 존재했다.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와 자녀 삼으시는 사랑을 경험하면, 율법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도 사랑하고 감사하며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율법은 항상 죄를 정죄하고 복음은 죄를 용서하는 변증법적 관계(Dialectic)로만 한정 지을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상관관계(Correlation)가 되도록 바꾸어 놓아, 구원받은 신자는 복음만이 아니라 율법에서도 신자를 성결과 행복으로 이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해, 복음 안에서 율법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여 소중히 여기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 결과 참된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믿음으로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워”(롬 3:31) 율법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역사한다.

2. 신론

웨슬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는 거룩과 사랑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함께 연결되어 있다. 즉 (1) 죄로부터의 분리와 순결을 의미하는 거룩과 (2) 죄인에게 먼저 다가올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용서하시면서 더 깊은 친교로 이끄시는 사랑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은혜란 그 거룩한 사랑이 죄인에게 경험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죄인에게 경험될 때는 아무런 기준이 없는 “무정형의 은혜”(amorphous grace)가 아니라, 거룩함에 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진 은혜”(normed grace)로 다가온다. 따라서 은혜는 죄 용서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에게 거룩함을 요구하고 또 가능하게 하신다. 따라서 은혜는 칭의로 그치지 않고, 중생과 성화를 포함한다. 또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길로 행할 수 있도록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심”을 포함한다. 참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태만과 방종이 아닌, 순종과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모든 것을 단독적으로 일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서 믿음과 순종이라는 반응을 원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기초해 있다.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적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다.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자유의지를 빼앗아 “나무 조각이나 돌덩어리같이” 도덕적으로 무능하게 만들거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인간을 강제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하심만이 아닌 충만한 지혜와 자비와 선하심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게 하시는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이, 노예의지를 지닌 인간을 이중예정과 불가항력적 방법으로 구원하신다고 가르치는 것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본질은 인간을 하나님께 반응조차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 폄하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에게 회복시키신 인격성과 책임성을 바르게 발휘해 하나님과 신앙과 순종의 올바른 인격적 관계를 맺는 데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관점에서 평가하면, 루터의 이중예정론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중 사랑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면, 성도의 견인 교리는 그분의 거룩하심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전능하심만을 강조해 성경적 균형을 벗어난 극단적인 가르침이다.

3. 기독론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언자 직분, 제사장 직분, 왕 직분이라는 삼중 직분으로 가르쳤다. (1) 예언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심으로 거룩함의 기준을 세우셨다. (2) 제사장 그리스도는 거룩함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려 죄 용서를 가능하게 하셨다. (3) 왕 되신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각 신자를 다스리심으로 거룩함의 기준에 도달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삼중 직분에 근거해 평가하면, 거룩함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죄인의 죄를 가져가고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주시는 행복한 교환이나 이중전가를 중심으로 하는 루터의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만 초점을 맞춤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직분과 사역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만 강조하면, 신자는 늘 죄를 짓고 용서받는 삶을 반복할 뿐, 거룩함의 기준을 깨닫고, 거룩함에 도달하지 못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함의 기준에 도달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직분 전체를 통해 더 넓고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웨슬리가 가르친 대로, 그리스도께서 거룩함의 기준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거룩함에 도달하지 못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성령을 통해 거룩함을 기준을 충족하게 하심 모두를 가르칠 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신자의 순종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순종의 동기와 방향과 능력을 부여하는 참된 기독교 신앙이 된다.

4. 성령론

웨슬리는 루터 못지않게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사람이 율법과 복음을 깨달을 수 없음을 강조했다. 율법이 죄인을 깨뜨리는 천둥, 번개가 되고 쇠망치가 되며, 복음이 나를 위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계시와 조명하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웨슬리는, 루터가 부인한, 성령의 오순절적 능력 즉 성령 세례를 통해 이 세상에서 성결할 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복음을 증거하는 삶이 가능함을 가르쳤다. 루터에게서 복음을 통한 성령의 위로는, 신자라도 죄인이어서 이 세상에서 결코 성결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 루터에게 성령의 위로는 죄에 대한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죄에 패배하는 신자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일깨워 주심을 통한 위로인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구약에 기록된 새언약의 예언(신 30:6, 11-14; 렘 31:33; 겔 36:25-27)과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부으신다는 요엘서의 예언(욜 2:28-29)을 신약의 오순절과 연결했다. 또 성령은 신자의 “마음을 깨끗이”(행 15:9) 하실 뿐 아니라, 각종 은사와 복음 증거의 능력을 부어주심(행 1:8; 2:14-21)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신자가 받는 제2차적 은혜로서 성령의 능력세례를 분명히 가르칠 뿐 아니라, 그것을 성결의 은혜와 동일시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입장은 은사중지론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이 사도적 영감을 받았고, 교황 안에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신다는 직통계시 주장 및 가톨릭 교회가 꾸며낸 기적들로 혹세무민하는 것에 대항하는 논증으로 은사중지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나는 신약에서든 구약에서든 … 기적이 사도 시대 … 혹은 특정 시기에 한정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어떤 성경 구절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이 세상 끝날까지 어느 시대, 어느 순간, 어떤 정도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기적 행하시기를 멈추실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은사중지론에 반대해 콘스탄틴 이후 시대 “기독교 교회 내에서 성령의 은사가 더는 발견되지 않는 진정한 이유”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식어서 …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은사중지론이 사실이 아니며 교회에 은사가 덜 나타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결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니엘 제닝스는 웨슬리가 53년간의 사역에서 경험한 초자연적 사건들을 일지, 편지, 설교 등에서 발췌해 『존 웨슬리와 초자연적 사건』(The Supernatural Occurrences of John Wesley, 2005)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 내용에는 축귀와 같은 귀신과의 영적 전쟁 16회, 자신과 지인, 심지어 말에게 일어난 신유의 체험 17회, 쓰러짐과 입신 19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거룩한 웃음과 귀신에 사로잡힌 사악한 웃음 12회, 성령의 임재에 압도된 결과로서 마음의 괴로움과 회개, 위로, 확신, 진동 등 14회, 거짓 예언과 참 예언 11회, 꿈과 환상 30회, 악인으로부터의 초자연적 보호 10회, 천사에 의한 인도와 보호 9회, 그 외에도 기도에 대한 많은 기적적 응답, 성령세례의 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웨슬리가 읽었던 조너선 에드워즈의 글과 조지 휫필드의 사역에서는 웨슬리 자신의 사역 못지 않게 많은 은사와 기적이 동반되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루터란 경건주의자들과 청교도들은 루터와 칼빈보다, 성령의 능력을 통한 신자의 변화와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경험하는 일에 적극적이었고, 신유와 은사 이해에서 은사중지론을 뛰어넘었다. 그럼에도 루터란 전통과 개혁주의 전통은 교리적으로는 루터, 칼빈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한다. 교회사에서 개신교가 은사중지론을 극복하고 성령의 능력과 풍성한 은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한 것은 존 웨슬리였다.

웨슬리의 성령론이 이처럼 오순절적 능력과 은사를 강조함에도 광신주의로 흐르지 않은 것은, 그의 성령론은 언제나 성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그리스도의 현존으로서 신자의 마음에 내주하심으로 신자의 본성의 새로운 구성요소가 되신다. 외부로부터 깨달음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로서 루터의 성화론과 비교해, 웨슬리에게 성화는 성품과 능력의 변화를 가져오는 신자 속 하나님의 현존으로서, 신자 자신의 능동적 의라는 관점에서 훨씬 진전된 개념이다. 신자 속에서 본성을 변화시키고 의의 동력을 일으키시는 성령의 내주하심과 능력부으심을 바탕으로 성령 충만한 신자는 성결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친 점에서 웨슬리 성령론은 종교개혁과 경건주의운동, 성결운동, 오순절운동의 강조점을 모두 포괄한다.

5. 구원론

하나님의 은혜는 죄 용서에서 그치지 않고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며 복음을 전파할 능력까지 주시므로, 웨슬리의 구원론은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강조점을 지닌다. 또한 웨슬리의 구원론은 믿음과 사랑의 이중적 강조점을 지닌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참된 믿음은 마음에 평안을 가져오지만, 이 평안은 자칫 나태와 방종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은 나태와 방종에 빠질 수 없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라는 말씀처럼, 비록 믿음이 행위를 낳기에 행위가 믿음에 의존하더라도, 행위에는 믿음을 변질되지 않게 지켜주고 믿음을 더욱 온전하게 하는 그 자체만의 역할이 있다. 따라서 루터처럼 믿음만 강조하고, 행함을 경시하는 것은 태만과 방종으로 인해 결국 믿음 자체를 연약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기에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믿음은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일 때라야 참된 믿음이며, 신자는 그 믿음을 통해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6. 인간론

웨슬리는 루터 못지않게 원죄와 인간의 타락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선행은총(또는 일반은총)을 베풀고 계심을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이미 은총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만이 아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이미 역사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행은총을 통해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어렴풋이 인식하는 종교성(롬 1:19-20), 양심을 통한 죄에 대한 자각(롬 2:14-15), 성령의 열매를 닮은 어느 정도의 선한 성품(갈 5:22-23),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 3:11), 의지의 자유를 통해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능력(눅 10:42)을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인간의 인격성을 회복시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은혜에 바르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을 부여하신 것이다.

루터는 인간에게 의지의 자유가 있다고 인정하면 반드시 공로사상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해 인간의 의지의 자유를 부인했으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통한 의지의 자유의 회복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신자가 노예의지론적 숙명론과 죄에 대한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책임 있는 인격체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게 한다고 보았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본질은 인간을 하나님께 반응조차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 낮추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은혜로 회복시키신 능력과 기능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데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아직 성결의 은혜를 받지 못한 신자에게 죄가 남아있고, 그런 신자에게도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실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웨슬리가 루터에게서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은 하나님께서 신자에게서 죄 된 본성을 제거하시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웨슬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죄 짓게 하심으로써 겸손케 하실 수는 없기에, “누구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죄를 지을 필연성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하여 … 시험이 와도 피할 길을 내시며, 감당치 못할 시험은 주시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겸손케 하시는 방법은 죄 속에 머물게 하심으로가 아니라, 인간을 연약성, 질병, 고통, 우둔함, 혼동, 실수 등에 머물게 하심으로다. 루터에게서 하나님의 은총은 주로 정죄 받던 신자의 양심에 복음을 일깨워 위로하시는 방법으로 역사하시지만,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양심 뿐 아니라 의지에도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을 바라고 행하게 하시는 능력으로 작용하신다.

 

나가는 말: 요약과 분석

루터와 웨슬리의 신학을 전반적으로 비교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학을 일차적으로 그들이 속한 시대와 종교라는 구체적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루터 신학의 역사적 맥락은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에 빠진 중세 가톨릭교회가 그 배경이 되고, 그것에 대항한 루터 신학의 특징은 구원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신중심적 신학이다. 이에 비해 웨슬리가 바로잡으려 노력한 것은 로마 가톨릭의 율법주의와 종교개혁자들의 부정적 율법관이 야기한 개신교의 율법무용론적 경향 모두이며, 그 양자를 바로잡는 웨슬리 신학의 특징은 성경적 균형과 조화라 할 수 있다.

루터는 율법주의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의 의를 내세워 하나님의 은혜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의 독립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기 우상화와 교만을 경계하려 했다면, 웨슬리는 율법주의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교만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신앙을 빌미로 태만과 방종, 거룩하지 못한 성품과 삶, 율법무용론으로 나아가려는 실천적 무신론을 함께 경계했다.

루터는 신학 전반에서와 각 주제들에서 인간의 어떤 행함과 헌신과 순종도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고, 인간 삶과 구원의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신중심적 신학을 건설하고자 했다면, 웨슬리는 ‘오직 은혜’에 대한 종교개혁적 강조를 수용하면서도, 은혜의 어떤 요소도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을 약화시켜 태만과 방종으로 나아가게 하는 핑계가 될 수 없고, 은혜는 오히려 순종의 동기와 능력과 목표를 부여함을 강조함으로, 하나님 은혜의 토대 위에서 인간의 책임과 신자의 거룩한 삶을 강조했다. 웨슬리 신학은 루터 신학의 수용하면서도 그 약점을 수정해 은혜가 신자의 거룩한 삶을 저해하지 않도록 보완한 것이다.

만약 웨슬리가 없었다면 개신교 신학은 지금과 같은 성경적 균형을 지닐 수 있었을까? 또 개신교회는 지금같이 성령의 역동적 은혜를 누릴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중세 가톨릭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 사이에서 인간 편 극단에 치우친 구원론을 가르쳤다. 루터는 가톨릭의 극단을 바로잡기 위해 그들과 정반대의 극단에서 상대를 효과적으로 공략함으로 종교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가톨릭의 인간 중심적 극단성을 깨뜨린 루터의 무기는 하나님 중심적 극단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루터 신학은 앞으로 웨슬리 신학의 특징이 될 성경적 균형과 조화를 결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웨슬리를 사용해 역사 속 기독교의 다양한 전통에 각기 흩어져 존재하던 성경적 진리의 파편들을 녹여 창조적으로 종합하게 하셨고, 그 결과 웨슬리 신학은 루터가 터부시하고 배제해버린 성경적 진리의 중요한 요소를 개신교 신학 내에 다시 회복시키는 성경적 균형을 지니게 된다. 웨슬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에 루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웨슬리는 루터가 멈춘 곳에서 더 나아가 루터의 단점과 한계를 극복했다. 그 점에서 필자는 웨슬리에게 누구보다 감사하면서 낙원에서 그를 반겼을 사람이 루터였을 것이라 믿는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더 이상 자신의 신학전통에만 갇혀 웨슬리 신학과 웨슬리안 전통을 터부시하거나 이단시해, 하나님께서 웨슬리를 통해 개신교에 회복시키신 성경적 은혜와 진리, 성령의 능력 있는 역사를 거부하거나 이단시하는 태도를 버려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사용하신 다른 모든 신학 전통들을 디딤돌로 삼아 성경적으로 가장 균형 있고 풍성하며 건전한 개신교 신학을 웨슬리를 통해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 개신교를 다시금 개혁할 충분한 역량을 갖춘, 가장 성경적이고 건전하며 능력 있는 신학이 바로 웨슬리 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