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계신 하나님과 생명의 풍성함


위르겐 몰트만, 이신건 옮김
(생명신학연구소/덕수교회 공동추최 몰트만 교수 특별초청 강연회 / 2018년 9월 16일 / 덕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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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앙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생명의 풍성함을 경험한다. 우리는 시편 42편 3절과 함께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


 그리고 만약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가까움을 느낀다면, 다음과 같이 노래하게 된다.


“내 몸과 마음이 살아 계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


 모든 인간이 생명에 굶주리고, 기쁨에 목마르며, 사랑을 갈망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생명의 굶주림을 물질적인 재화로 충족하려고 하며,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단지 즐기려고만 하며,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그리워하며, 자기 사랑에 빠져 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까이 계신다. 왜냐하면 채워지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며 사랑받지 못하는 그들의 생명도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풍성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질문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1. 참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인가? 


a. 살아 계신 하나님은 생명의 영원한 샘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심장 박동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단지 우리의 사멸할 생명과는 무한히 비교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샘처럼 우리의 생명을 흘러넘치게 하고 다른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생명이기도 하다. 모든 유한한 생명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모든 유한한 생명은 생명의 무한한 샘을 갈망한다.

b.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분이고, 그의 영원한 영은 만물 속에 있다.”라고 지혜서(11:28)는 말한다. 생명에 대한 사랑은 자기로부터 창조주 하나님의 영을 이끌어오며, 하나님의 영을 만물 속으로 가져온다. 이것은 먼저 인간에게 해당한다.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살아 있는 생기, 숨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고, “생령”이라고도 불린다. 단지 인간에게만 그러한가? 시편 104편 29-30절은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낯을 숨기시니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시니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사랑하시는 모든 피조물을 그의 생명의 영으로 채운다. 이것은 각각의 개별 피조물만이 아니라 그들의 사귐과 상호간의 관계에도 해당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지만, 생명은 사귐을 통해 풍성해지고 강해진다. “그의 영원한 영은 만물 안에 있다.” 요한 칼뱅도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영은 그 어디나 존재하며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만물을 유지하고

만물을 보존하고

만물에게 활력을 준다.

그는 만물 안에 자신의 능력을 부어주며

이를 통해 만물에게 존재와 생명과 운동을 약속한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이다.(Institutio I, 13,14)


c. “하나님의 큰 기쁨” :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속에는 운동이 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부동의 원동자”가 아니다. 그 생명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인간의 목마른 영혼을 찾는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가득 채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죽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시며,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계신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죽음의 깊은 밤에 하나의 불을 밝히신다.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큰 자비”다.

최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영원한 생명의 “첫 열매”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출현”을 보았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요일 1: 1-2)


살아 계신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고 일으키실 때, 생명의 풍성함이 생겨난다. “몸과 마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우리의 생명은 영원히 긍정되며, 죽음은 우리에게서 생명을 빼앗을 수 없게 된다. 단지 마음 안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감각과 함께 생명의 기쁨과 생명의 욕망이 생겨난다.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모든 죽음에 대한 혐오가 생겨난다.

 “모든 육체 위에 영이 부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오순절 소식이다. “모든 육체”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영”은 하나님의 생명력이다. 살리는 능력은 메마르고 황량한 땅에 내리는 비처럼 온다. 몸과 마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피조물의 몸과 마음을 기뻐하는 것이다.  

d.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독특한 생명과 기쁨의 종교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은 “생명 전체를 끝없는 축제”로 만든다고 어느 부활절에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교부 아타나시우스는 선포했다.

“하나님의 큰 기쁨”의 차원을 측량해 보자. 그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우며, 우리의 생명을 우리의 예감보다 더 크게 만든다. 기쁨은 생명에 대한 능력이요, 사랑의 진동이요, 창조적인 시작에 대한 즐거움이다. 우리 인간은 기뻐하도록 창조되었다.

먼저 구약성서의 시편을 들여다보자. 하나님의 오심과 가까움은 불안과 놀람이 아니라 기쁨을 가져온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하나님의 이 살리는 임재는 종종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이라고 묘사된다. 얼굴은 언제 빛나는가? 한 엄마가 그녀의 갓 태어난 아기를 바라볼 때, 그의 얼굴을 빛난다. 사랑하는 자의 눈을 바라볼 때, 그의 눈은 빛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축복의 능력이 나온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충만하고 축제적인 생명으로 만든다.

기쁨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심판과 결부되어 있다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때, 기쁨은 자연을 활짝 피어나게 한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 96:11-13)


하나님의 공의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그것은 굴복당한 자를 일으켜 세우고, 시든 것을 푸르게 하며, 병든 자를 고치며, 늙은이를 다시금 젊게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실 때, 두 가지 전환이 일어난다. 먼저 하나님 안에서, 그 다음에는 인간 안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자신의 “숨겨진 얼굴”을 “빛나는 얼굴”로 바꾸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죄에 대한 혐오를 죄인들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신다. 그리고 인간은 죄와 불의의 사슬로부터 생명과 정의로 돌이킨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그리고 구원받은 자가 다시 돌아올 때, 그의 머리 위에 영원한 기쁨이 생겨날 것이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그렇다. 하나님은 구원을 받은 자들과 함께 친히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곧 구원받은 자신의 피조물을 기뻐하시고 노래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놀라운 묘사가 아닌가?

기쁨은 믿음보다 더 원초적이다.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이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친히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가? 헬라어에서 은혜(카리스)와 기쁨(카라)은 언어적으로 매우 가깝다. 바울은 심지어 믿음과 기쁨을 맞바꾼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고후 1:24)


신약성서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명은 잃어버린 자를 찾은 것을 기뻐하는 것을 통해 표현된다. 예수는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함으로써” 하나님을 계시한다. 누가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해 그 의미를 드러낸다. 먼저 “잃어버린 양”이 존재한다. 양은 길을 잃었고, 목자로부터 벗어났다. 목자는 양을 찾고, 양떼를 버려둔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한다.”(눅 15:5) 로마의 카타콤에 있는 가장 오래된 예수 그림은 어깨에 잃은 양을 메고 있는 “선한 목자”를 보여준다. 그 다음에는 “잃어버린 드라크마”이다. 가난한 여인은 그것을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 발견한 후에 이웃을 부른다. “나와 함께 즐거워하자.”(15:9) 물론 우리는 이웃의 행복을 즐거워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동정하기가 더 쉽다. 그렇지만 함께 기뻐하는 것은 자신을 망각한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기쁨이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아들”과 그를 기다리는 아버지(15:11-32)가 나온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15:24)


살아 계신 하나님은 잃어버린 것을 찾은 것을 즐거워하시며, 잃어버린 자를 찾은 것을 크게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뻐해야 하며, 살리시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이 지배하는 곳에서 새로운 생명을 기쁘게 맞이한다.



2. 생명의 풍성함 


살아 계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다르지 않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을 영위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위해 열린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은 우리의 인간적, 사멸적인 생명을 받아들인다.

우리의 인간적, 사멸적인 생명은 그리스도와의 사귐 속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으로 변한다. 비록 죽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살아간다.


1.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며,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딸과 아들로 변한다. 이런 인간적 생명은 이 땅에서 유한하고 죽어야 할 생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말한다. 이로써 사람들은 생명을 죽음의 지배 아래 놓는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이 유한하고 아프고 죽어야 할 생명 속으로 하나님이 침투하시며, 하나님의 무한하고 불멸하는 생명이 시작된다. 영원한 생명은 여기, 그리고 오늘 믿음 안에서 시작된다. 이 즐겁고 고통스러운, 사랑을 받고 고통을 받는, 성공하고 실패하는 이 생명은 이미 영원한 생명이다. 만약 우리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바라본다면, 모든 고난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영원한 생명 안에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닫게 된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실리콘 벨리가 약속하는 것처럼 150살이나 더 오래 살아가는 무한한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충만한 생명, 하나님의 충만함 속에 있는 생명이다. 이 생명은 짧거나 긴 생명일 수 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으로 충만한 생명이라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요한복음이 바로 이를 말하고 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7)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요 11:25)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기”(요 1:4) 때문이다.

단지 마음만이 아니라 욕망과 질병을 가진 몸도 영원한 생명을 경험한다.

 “너희 몸은 ...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 19-20)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태어난다.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공간이 존재한다. 우리가 말하듯이, “세상으로 나오는” 모든 아기는 하나님의 생명의 공간 안에 숨겨져 있다. 시편은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찬양한다. 


“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시 22:9-10)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죽는다. 우리가 볼 때, 죽음은 사멸하는 생명의 종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의 죽음은 불멸하는 생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이미 여기서,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더 많이 느낄수록 우리에게 죽음은 더 가벼워진다. 우리의 사멸하는 생명 안에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지금 벌써 느끼는 곳이 어딘가?

첫 번째로는 사랑 안에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두 번째로는 기쁨 안에서다. “사랑이 기뻐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머물러 계신다.”라고 오래된 그리스도교 경전은 말한다. 우리는 기쁨을 위해 태어났다.

세 번째로는 희망 안에서다.  희망은 미리 기뻐하는 것이다. 희망은 하늘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며,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로부터 현재 안으로 가져온다.


2. 조상들과의 사귐 안에 있는 생명


비록 항상 의식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인간으로서 세대의 계승 속에서 살아간다. 서구의 현대 세계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존재해야 한다는 개인적 의식이 세대의 계승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집단적 가족 의식을 억눌렀다. 돌아가신 분들은 현대적 의미에서 “죽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은 세대 계약은 해체된다. 비록 부모들이 병들어도, 부모들이 동일한 장소에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자녀들은 더는 부모를 돌보지 않는다. 지금 세대는 미래 세대에게 높은 부담을 떠넘긴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조상 숭배가 생활을 규정했다. 거기서는 조상들과 후세대들의 사귐이 설명된다. 돌아가신 분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조상들의 세상은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의 다른 측면이다. 후손들의 삶은 조상들 앞에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만약 조상들에게 불의한 일이 일어났거나 조상들이 불의를 행했다면, 이것은 후손들의 삶을 억누른다. 가족은 세대들로 구성되며, 하나의 살아 있는 단위다. 아메리카 사람들은 성급하게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지만, 가족 이름(성)은 중요하다. 성서 속의 긴 족보는 아시아 지역의 족보와 유사하다.

서구 세계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기억하고 기념하는 장소를 필요로 한다. 기억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녀를 가진 사람은 그의 조상들을 존중한다. 우리는 과거에 의해 결정된 현재 속에 태어나며, 우리 조상들의 축복이나 부채 속에서 살아야 한다. 독일 베를린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은 후손들이 과거의 세대들이 범했던 불의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권한다. 진실을 알기 위해, 그리고 공적인 의식 속에서 억압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공적인 기념일과 기념 장소를 세워야 한다.

살아 있는 자들과 돌아가신 분들의 사귐을 설명하는 그리스도교적인 근거는 있는가? 그렇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9)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돌아가신 분들과 연합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찾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찾는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서만 그들이 살아 있는 희망으로 거듭났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도 그런 의미를 지닌다. 동방교회의 부활절 예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모든 것, 곧 하늘과 땅과 죽음의 나라가 이 빛으로 채워졌다.”


부활의 희망은 전통적인 조상숭배를 비춰주고 조상숭배를 미래를 향해 세우는 그리스도교의 부활의 빛이다. 그것은 우리를 조상들과 묶어주는 부활의 희망이다.

타이완에서 철학교수 루(Luh) 박사가 살고 있다. 그는 그의 중국계 가족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아들이며,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작년에 조상을 모시는 위패함 위에 십자가를 얹고는 나에게 그의 조상들을 축복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음과 같이 그를 축복했다. “당신의 조상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지만, 그리스도는 당신의 조상들을 알고 계셨고, 그들과 가까이 계셨다.”



3. 땅은 살아 있다.


근대가 시작된 이래 서구 사람들은 땅을 물질과 에너지로 이루어진 죽은 물체로 생각했고, 그래서 땅의 자원을 착취하고 땅의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에 부합하는 인간상은 땅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지배하는 권리를 물려받았다. 이것은 인류 전체에 확산된 현대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세계상이 지구를 파괴하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인식한다. 기후 변화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사막이 늘어나고, 해수면은 올라가며, 대도시의 공기 오염은 호흡할 공기를 빼앗아가고, 바다는 인간이 만든 플라스틱으로 오염되고 있다. 더욱이 인간은 원자폭탄으로 자신의 생명과 지구의 생명체를 죽일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다.

제임스 러브록(James Livelock)의 가이아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하나의 독특한 복합적인 체계이기 때문에 생명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의 푸른 별 “지구”는 “살아 있는 유기체”다. 만약 우리가 생명을 좁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자기 자신을 재생하는 것은 살아 있다. 지구는 새로운 지구를 생산하지 못하지만, 다른 생명을 만들어낸다. 지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기원이다.

이것은 성서의 땅 이해와 일치한다. 창세기 12장 24절은 “땅이 생명, 곧 모든 식물과 나무와 동물을 만들어낸다.”라고 말한다. 다른 피조물에 관한 언급은 없다. 인간도 땅에서 취해졌고, 다시금 땅으로 돌아간다. 땅을 존중하고 땅의 생명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의 생태학적인 세계상이 필요하다.

인간은 땅의 주인이 아니다. 풀과 나무는 자연에서 광합성을 할 수 있지만, 인간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풀과 나무가 만들어낸 산소로 호흡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방식으로 살아 있는 창조 공동체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땅은 살아 있고, 우리는 땅에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