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천

 

 

 


“당신의 진짜 색을 보여주어라!” 우리 사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이 요구는 다음 시즌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규정할 것이다. 실내 디자인의 대세는 실용성(기능성)과 장식성 추구이다. 선명성, 지성, 그리고 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넉넉하게 장식된 시원하고 깨끗한 거실 분위기를 선호할 것이다. 20세기 초의 모더니즘적 예술경향과 르네상스의 전통적 경향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색깔을 보여지 않을 수 없는” 긴장된 영역이 형성될 것이다.


1. 색이 가지는 구성하는 힘. 이 힘은 일곱 가지 기본색들의 힘과 구성주의1)의 엄밀성이 결합된 것이다. 이런 결합에 의해 완전한 현대성과 선명한 윤곽을 가지는 공간이 창조된다. 선택된 색깔들의 조합이 가지는 효과와 그 효과의 강도는 대단히 크다. 고상한 전통이 장식적 요소들에 결합될 때 고도의 미학적 무대가 탄생된다.


2. 단색의 입체파. 여기서는 중간색 계열의 일곱 가지 색깔들이 입체파의 본질과 결합된다. 이런 예술형태(입체파)의 두드러진 특징은 실제적인 대상으로부터 추상적인 것들로의 이행인데, 이런 이행은 “무색들”에 의해 보완될 때 이상적이 된다. “무색들”은 영상이 투사되는 스크린으로서 필연적인 휴식을 제공하며 새로운 방향설정을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지난 세기들의 매혹적인 동기들과 인용구들은 새로운 긴장을 제공한다. 이런 조형과 색조에는 관점변경이 하나의 역동적인 삶(삶의 스타일)과 거주(실내 디자인)의 일부이다.


3. 초현실적인 밝은 색. 노란색과 빨간색의 미묘한 색상의 차이가 초현실주의와 결합될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태양의 밝음이 감정과 결합되어 따뜻한 세계를 형성한다. 이때 공간을 쾌적하게 조명하여 비밀이 없는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동기들과 정반대되는 초현실주의의 신비한 요소들은 또 다른 창조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런 거주 공간은 현대적 측면과 낭만적 측면의 감동적이고 매력적이며 인상적인 상호작용이다.


4. 미래파 여명. 푸른색과 녹색의 차가운 스펙트럼이 미래파의 용기와 냉정함에 의해 더욱 고조된다. 달의 서광이 합리성과 만난다. 게다가 동화적인 액세서리들이 매혹적으로 대조되면 전체적으로 신비한 매력의 인상을 가지게 한다. 그렇게 해서 편안한 분위기가 형성되는데 그런 분위기는 동시에 전진운동을 상징하고 이러한 실내 디자인 스타일의 진보적 성격을 표현해 준다. 초현실주의 밝은 색에서처럼 모더니즘과 낭만주의가 동시에 표현된다.



- 디자인은 기술인가? 예술인가? 기술과 예술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기술은 사물을 생산하고 예술은 사물을 통해 「그 사물과 다른 것」(allo agoreuei)을 드러내 보여준다.2) 따라서 예술은 Allegorie(비유)이다. 예술은 사물과 동시에 사물이 아닌 다른 것을 앞에 던져 준다(Symballein).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Symbol(상징)이다.


예술작품이 드러내 보여주는 그 다른 것은 무엇인가? 존재이며 존재사건이며, 정신(주관적 정신 객관적 정신, 절대정신)이다. 그것은 존재자와는 다른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세계내 존재자이며 따라서 존재자와 다른 것은 세계내 존재자의 세계이다. 존재사건은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사건으로 「죽을 자, 신적인 것, 땅, 하늘」이란 네 요소들의 상호작용이다. 이 네 요소들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거주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의 사물을 사물이게 하는 사물성이다. 이러한 사물성에 의해 하나의 사물은 이제 더 이상 단순히 사물이 아니라 예술이 된다. 예술작품에는 이 네 요소들이 들어있어야 한다.


인간은 네 가지 방식으로 거주함으로써 존재한다. 1. 인간은 그가 땅을 구원하는 한 거주한다. 2. 인간은 하늘을 하늘로서 수용하는 한 거주한다. 3. 인간은 신적인 것을 신적인 것으로서 기다리는 한 거주한다. 4. 인간은 그의 고유한 본질 즉 죽음을 죽을 수 있는 본질에 순응하여 잘 죽을 수 있는 한 거주한다.


존재사건은 사물들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어떻게 사물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가? 여기 있는 이 항아리는 단순히 하나의 사물로서의 항아리이지만, 우리가 거기에서 존재사건을 볼 때 그 항아리는 예술품이다. 항아리는 물과 포도주를 담아 그것들을 우리에게 건네준다. 항아리는 물과 포도주를 받아들임으로써 채워지고, 채워진 것은 다시 쏟아 부어진다. 물에는 샘물이 있고, 샘에는 암석과 땅의 어두움이 있고 하늘의 이슬과 비가 머물고 있다. 포도주에는 땅의 자양과 하늘의 태양이 머물고 있다. 항아리는 죽을 자의 목마름에 마실 것을 선사한다. 항아리는 또한 물과 포도주를 따름으로써 신들에게 봉헌될 것을 선사한다. 항아리는 땅과 하늘과 신적인 것과 죽을 자를 한 군데 모은다. 항아리는 사물이며, 그 사물 속에는 인간의 삶이 들어있다. 그리고 이 넷의 모임이 세계를 이룬다. 이제 사물은 더 이상 단순히 인간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우리는 사물 속에서 삶의 길을 발견한다.

  

은 하천과 암석과 식물과 동물을 돌보고 보호해 주며 그들에게 영양을 공급해준다. 하늘은 태양의 운행, 달의 진행, 별들의 광채, 한 해의 계절들, 낮의 빛과 여명이며 밥의 어두움과 밝음이며 날씨의 은혜와 험함이며 구름의 흐름과 에테르이다. 신적인 것은 신이 나타나는 곳이다. 그것은 신의 사자이다. 그 속에서 신이 나타난다. 죽을 자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죽을 자라 불린다. 죽는다는 것은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존재를 그 속에 감추고 있다. 죽을 자는 죽음을 받아들일 때 존재와 본질적인 관계를 맺는다.


- 존재사건과 예술


   존재사건이란 사물 속에서 사방이 모이는 사건이다. 우리는 하나의 사물 속에서 세계를 본다. 즉 그 사물 속에 하늘과 땅과 신적인 것과 죽을 자들이 모여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모든 사물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오직 예술작품만이 사물이다.

   예술작품 속에 세계가 있고 - 세계는 위에서 언급된 사방의 작용이다 - 우리는 예술 작품 속에서 그 세계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우리의 삶의 세계가 된다. 세계는 인간의 지적인 노력에 의해 드러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그 장소가 예술작품인 것이다. 이렇게 드러나는 세계를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해석학의 작업이며 특히 현상학적 해석학의 작업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평론은 현상학적으로 가능하다.

  

세계를 드러내는 두 가지 대립적인 방법으로 기술과 예술이 있는데, 현대의 기술문명이 직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술을 통한 세계의 이해에 있다. 기술에 있어서는 사물의 존재방식이 도구이지만 예술은 실존적 세계를 드러낸다. 그 세계는 사방 즉 「죽을 자, 신적인 것, 땅, 하늘」의 동근원적인 상호작용이다.

  

기술과 예술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가치관의 차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생산력을 추구하며 모든 것을 이 생산력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현대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예술을 통한 세계의 이해, 예술작품 속에서 실존적 존재방식을 찾아내는데 있다.


- 예술작품과 미학


- 미학(Aesthetic)이란 무엇인가? Aesthetic은 「아이스테시스(αἴσθησις: ̈aisthesis)에 어울리는」 것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리고 아이스테시스(αἴσθησις: ̈aisthesis)에 어울리는 것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므로 미학은 아름다움을 다루는 학문이다.

   아이스테시스에 어울리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아름다운가? 어떤 것이 앞에서 언급한 다른 것(ἄλλο)을 드러낼 때, 그것을 간직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한다. 「아름다운」을 의미하는 독일어의 「Schon」은 scheinen, schauen, schonen과 같은 어군에 속하는 것 같다. 「미」에 관한 다음의 정의들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Augustinus: splendor ordinis

Albertus Magnus: splendor formae

Thomas von Aquinas: splendor veritatis


 


1)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조형 예술과 건축 분야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조형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순수한 기하학적인 요소들을 연상 작용에 사로잡힘이 없이 구성하고자 했다.


2) 예술은 「낯설게 하기」(Verfremdung)이다. 예술은 하나의 사물을 낯설게 함으로써 그 사물과 다른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