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디스트 사회적 실천의 토대로서 웨슬리의 신학사상

 

장기영 박사

 

들어가는 말

마 25:34-36, 40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성결교, 감리교, 구세군, 오순절교단 등 범웨슬리안 교단들의 신학적 뿌리인 존 웨슬리는 위 구절을 본문으로 “의에 대한 보상” (1777) 이라는 설교에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갈5:6) 을 통해 이웃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것을 나누었던 사람이지, 믿음지상주의를 외치며 이웃을 등한시했던 사람일 수 없다는 성경적 진리를 역설한 바 있다. Mildred Wynkoop 에 의해 “현대의 사랑의 사도” 로 불린 웨슬리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사랑의 대상으로서 이웃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이끈 메소디스트 운동은, 하나님 사랑을 믿는 신앙 및 성령을 통한 하나님 사랑의 직접적 체험이 폭발시킨 거대한 응답적 사랑의 에너지를 이웃의 영적, 물질적 복지를 위한 헌신으로 승화시킨, 사랑의 운동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존 웨슬리는 개신교 종교개혁을 보완하고 완성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웨슬리의 제자이자 메소디스트 운동의 지도자였던 존 플레처는 당시 개신교 신학과 실천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과거 종교개혁자들이 카톨릭교회로부터 개혁을 일으킨 것과 같이, 현재 우리는 율법무용론으로부터 개혁을 필요로 한다.” 플레처가 묘사한 대로, 웨슬리의 신학과 부흥운동은 종교개혁의 오직 은총, 오직 믿음에 대한 강조가 역사적으로 신자의 거룩한 삶과 선행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개신교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을 교정하여, 칭의와 성화, 믿음과 사랑,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 모두를 균형 있게 회복하려 한 새로운 종교개혁이었다.

한국 개신교에 웨슬리의 부흥운동과 같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또한 신앙과 거룩한 삶이 바르게 조화를 이룬 이와 같은 종교개혁이 지금보다 더 필요한 때가 있었겠는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신자들을 참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삶으로 인도하지 못하여 사회로부터 도덕적 타락과 이기심을 이유로 우려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종교개혁의 모토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외치되, 성도들의 삶은 변화가 없고 사회에 긍정적 기여를 하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실성은 의심을 받고 교인 수 이탈의 가속화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때에 존 웨슬리의 사회사상은 한국교회의 문제점 자각 및 교회의 회복과 갱신,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훌륭한 지침과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하여 개인적 구제의 차원에서, 또한 사회적 불의 해결을 위한 사회 시스템 개선에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해서는 만프레드 마르쿠바르트의 『존 웨슬리의 사회윤리』 및 데어오어 러년의 편저인 『웨슬리와 해방신학』 등과 같은 해외서적과, 국내의 연구로는 김홍기의 책 『존 웨슬리의 희년사상』, 그리고 김승용, 오해춘의 “18세기 요한웨슬리의 사회복지활동 연구” , 김영선의 “존 웨슬리의 사회복지 목회” 와 같은 연구논문 등이 잘 밝혀주었다. 그런 점에서 본 논문은 웨슬리가 앞장서서 참여하였던 사회 정의 및 복지 향상을 위한 활동들에 대해서도 다루지만, 그보다는 그의 사회적 실천의 토대가 된 그의 신학적 사회사상을 밝히는 데 보다 중점을 두고자 한다. 이 논문의 주된 내용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인 “Sinai and Calvary: A Critical Appraisal of the Law in Martin Luther and John Wesley” 에서의 연구를 토대로 하였으며, 필자는 이 논문 발표를 웨슬리의 사회사상 연구를 더 깊이 발전시키는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I. 웨슬리와 사회적 실천

Thomas W. Madron 은 웨슬리에게 사랑이란 “개인적 개념이라기보다 사회적 개념”이며 성화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의 차원을 가진 것이라고 바르게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산상설교(4)” (1748) 에서 은둔의 종교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개인적인 것으로만 보는 것에 반대하여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 라고 확언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성품과 기질은 불경건하고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접촉 속에서 연단되며, 둘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웃에게 전파하고 발산하고 전달한다는 점에서이다.

웨슬리는 또한 그의 “찬송 및 성시집(Hymns and Sacred Poems)” (1739) 서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회적 성결 (social holiness)” 의 복음이라고 제시하였다. 개인 구원의 신앙이 어떻게 사회적 성결로 연결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웨슬리는 참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갈5:6) 이라는 말로 대답한다. 성령께서 신자의 영혼에 새기시는 내적 인상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롬8:16) 을 증거하시면, 신자는 성품과 삶에 변화를 받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랑의 결과로 신자는 모든 악을 버리고 최선을 다하여 이웃에게 선행 베풀기를 힘쓰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웨슬리가 사회적 성결, 사회적 복음을 설명하면서 강조한 참 그리스도인의 믿음 또는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삶에 대한 묘사 등을 종합하여 그의 “사회”의 개념을 추론하면, 사회란, 신적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의 대상과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의 대상으로서 인간 세상이며, 인간적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살아가며 영적, 정서적, 물질적 영향과 도움을 주고 받는 인생의 동반자들이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를 전해주어야 할 섬김과 선행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사회에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악인과 선인들,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 노예를 부리는 자와 노예로 사는 자가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부정적 측면에서, 사회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마귀와 짐승의 형상을 가진 타락한 인간이 모여 사는 세상이요, 그 안에서 부정과 불의, 탐욕과 권력 남용, 정욕과 방탕, 가난과 빈부 격차 등 수많은 개인적 죄와 사회적 죄로 그 구성원들이 억압과 고통을 당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웨슬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사회에 관심을 갖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것은, 사회의 구성원인 이웃들이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으로 존귀하게 창조하셨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피 흘리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며, 또한 참 그리스도인의 믿음 및 성품과 삶이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i. 그리스도인의 개인 윤리

웨슬리의 윤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이웃에 대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사랑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와 이기적인 자기애를 극복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방해물들을 극복하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신자의 태도로서 웨슬리는 자기 부인과 하나님 앞에서의 청지기 의식을 강조하였다.

“자기 부인” (1760) 이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인이 “모든 때와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 대하여 “가장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필수불가결하도록” 지켜야 하는 그리스도의 명령임을 가르친다. 자기 부인은 신자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무수히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 명령이다. 타락한 존재인 우리는 사랑과 반대된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죄와 악을 피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청지기 의식 역시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돌보는 데 있어 본질적으로 중요한 태도임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인 라이프스타일로서 선한 청지기 의식의 강조는 웨슬리의 글 전체에서 고루 나타난다. 주인 되신 하나님과 그의 청지기로서의 인간이라고 하는 관계보다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을 잘 표현하는 개념은 드물 것이다

"돈을 빌린 사람은 빌린 돈을 다 돌려주어야 하지만, 돌려줄 때까지는 그 돈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돈을 그렇게 마음대로 사용할 자유가 없고, 오직 주인의 뜻대로 사용할 뿐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청지기와 같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오직 주인의 것들로서 주인은 이 모든 것들을 오직 그의 말씀 안에서 제시하신 방법대로만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그것들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웨슬리는 이웃 사랑의 관점에서 자기 부인과 선한 청지기 직분을 돈의 사용 및 어떻게 옷을 입고, 음식을 먹고, 시간을 사용할 것인지 등 삶의 다양한 영역에 적용하였다. 한 예로, 웨슬리는 증류주 제조와 과도한 음주에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는 과도한 음주가 사람들을 분노와 적의와 정욕 같은 세속적이고 육욕적이고 마귀적인 기질로 인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술의 양조와 증류에는 많은 양의 식량이 사용되어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자기 부인과 청지기 직분을 실천하지 못하면 이웃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설교 “더 좋은 길” (1787) 에서 웨슬리는 자기 부인과 청지기 직분을 시간과 돈의 사용에 적용하였다. 돈은 소중한 하나님의 축복 중 하나로서, 신자들은 심신의 건강 증진을 위해, 자신과 가족들의 필요 공급을 위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궁급한 자들을 돕기 위해 시간과 돈을 절약해야 함을 가르친다. 또 다른 설교 “돈의 사용” (1760) 에서 웨슬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벌라 ... 할 수 있는 대로 저축하라...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나누어주라” 를 그리스도인 경제 윤리의 세 가지 법칙으로 제시하였다. 이중 첫 번째 법칙은 자본, 자산, 또는 생산수단 등을 획득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두 번째 법칙은 그러한 자산들을 사용하는 데 있어 자기를 부인함으로 무익한 지출과 사치를 피하라는 강조이고, 세 번째 법칙은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서 기본적 필요 이상의 재화를 축적하지 말고 이웃을 위해 사용할 것을 역설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무능함의 원인들” (1789) 이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세 번째 법칙은 지키지 않으면서 처음과 두 번째 법칙만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 이전보다 배나 더 지옥의 자식들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자기 부인과 선한 청지기 직분에 따라 이웃을 돕지 않는 부자는 이웃을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또한 자신의 행실을 본받는 사람들을 교만과 정욕과 세상 사랑 같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으로 망치게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선한 청지기 직분과 자기 부인을 사랑의 명령 또는 황금률과 연결시켜, 그리스도인이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을 자신과 동일시할 것을 강조하였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도록 하시기 위해 그의 재산의 일부를 당신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의 명령은 당신이 자기 자신을 당신에게 맡겨진 그의 재산에 의해 공급을 받아야만 하는 궁핍한 사람들 중에 하나로 보라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그러한 태도를 가지고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주심으로 보상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Randy Maddox 는 웨슬리의 사랑, 자기 부인, 그리고 청지기 직분에 대한 가르침을 네 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한다. “첫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둘째, 우리는 맡겨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보시기에 합당하도록 사용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가 재물을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집과 음식 등 필요한 곳에 사용하기를 기뻐하신다. 넷째, 궁핍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한 사치에 재물을 허비하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이다.”

ii. 메소디스트 사회 봉사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대한 웨슬리의 가르침과 짝을 이루는 메소디스트 사회 활동들은 웨슬리가 사랑에 기초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봉사를 어떻게 기독교 신앙 속에 포함시키려 노력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웨슬리의 지도 하에 이루어진 메소디스트들의 사회적 활동들을 넓은 맥락에서 보면, 처음에는 가난한 자들, 주변인들, 억압받은 자들을 돕는 것으로 출발하였으나, 점점 사회의 경제적, 도덕적 불의를 저항하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간 특징을 보인다.

웨슬리는 옥스포드의 학생일 때부터 “옥스포드 시의 두 교도소에서, 가난한 가정들에서, 구빈원 및 빈민층 자녀들을 위한 학교에서” 사회적 봉사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1738년 이후 메소디스트 운동이 부흥기로 접어들었을 때, 웨슬리는 음식과 의복의 공급, 무료의료 활동, 무이자 대출, 일자리 알선, 학교 설립 및 빈민층 자녀 교육, 주일학교 운동, 문맹 퇴치를 위한 성인 교육, 출판 사업 등 다양한 사회봉사를 메소디스트 활동에 포함시켰다. Madron 에 의하면, “런던의 올드 파운더리 집회소는 미망인을 위한 자선의 집, 아이들을 위한 학교, 아픈 사람들을 위한 약국, 일하는 직장과 직업 소개소, 대출 사무소와 은행, 도서관 등 다양한 활동과 계획들의 용광로였다.”

그러나 점점 웨슬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금을 전달하거나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만으로는 사회적 불의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사회의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해 가난과 실업에 연결된 사회적 원인과 연결고리들을 분석하여 경제적 불의 배후에 숨어있는 도덕적인 악들을 공격하였다. 그는 빈농들의 공동경작지 사용을 금지함으로 그들을 시골로부터 내쫓아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게 만든 공동경작지 폐쇄법을 비난하였고, 초기 자본주의와 정부 불간섭 정책에 반대하여 위기의 시기에는 정부 주도적 경제 계획 및 통제가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하였다. 노예 무역을 기독교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일로 여겨, 노예소유자들을 꾸짖고, 윌버포스의 반노예제 운동을 격려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앞장섰다.

더 나아가 웨슬리는 “생활방식의 개혁” (1763) 이라는 설교에서 생활방식개혁협회의 활동 같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봉사를 장려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악한 일들을 반대하고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궁핍한 자들을 돕는 일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범하는 일, 노름, 매춘, 불경한 맹세, 공적인 소란행위 같이 불경건하고 불의한 일을 대항할 것을 역설하였다. 웨슬리의 통찰과 실천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적용되어야 할 분야는 직업과 노동, 교육, 의료, 인권 등 모든 부분을 포괄하였다.

웨슬리는 변화된 개인이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혁해나갈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을 믿으면서, 자주 개인들이 연합하여 사회적 불의에 대항하여 더 효과적으로 일할 것을 촉구하였다. Irv A. Brendlinger 에 따르면, 그의 노예 무역 반대 활동이 잘 보여주듯 1780년대 후반기의 웨슬리는 사회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메소디스트들이 법을 바꾸도록 의회에 청원하기를 요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적 불의에 대항하는 웨슬리의 방법이 전적으로 개인적 접근방법을 뛰어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가 죄를 개인적 악과 방종으로 보았지, 탐욕과 억압과 사회적 불균형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웨슬리의 윤리로는 철저한 사회 개혁의 희망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리처드 니버의 섣부른 비판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Brendlinger 는 이에 반대하여 ‘비록 사회의 구조 자체를 개혁하는 것을 통해서라기보다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개인으로부터 퍼져나가는 것을 통해서이지만, 웨슬리는 완전한 사회개혁을 꿈꾸었다”고 바르게 주장한다.

성결한 개인들이 사회 변화의 열쇠라고 보았던 웨슬리의 방법은 옳았고, 그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는가? Brendlinger 의 대답은 매우 긍정적이다

"대체로 웨슬리는 그의 사회윤리를 사회구조 개혁으로 연결시키지 못했지만, 시간이 흘러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점점 사회구조의 개혁으로까지 나아갔다. 메소디스트 운동의 제 2 세대, 제 3 세대 지도자들은 탄원과 배척 등 법적 행위들을 통하여 웨슬리의 메시지를 사회의 정책 수립의 중추에까지 확장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입법 개혁은 복음적 부흥운동에 깊이 영향을 받아 금주운동, 어린이와 동물 학대방지, 더 발전된 노예방지 운동 등의 개혁을 이루는 데까지 나아갔다 ... 변화된 개인은 사회 구조의 변화를 일으키도록 고무되었고, 사회 구조의 개혁을 지지하고 이루어내는 일에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 그의 생애 말년에 웨슬리는 그러한 종합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는 평생 사회를 이루는 구성요소로서 개인의 중요성을 결코 경시한 적이 없지만, 사회 구조가 지닌 실질적 영향력을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이다.”

II. 웨슬리의 사회사상의 신학적 기초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구속하기를 원하셔서 그리스도인들을 섬김과 사랑, 선행을 위하여 보내신 사회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실천했던 웨슬리는 어떤 신학적 사고의 바탕 위에서 그렇게 한 것인가?

Wynkoop 은 하나님, 인간, 신앙, 구원, 성결 등 웨슬리가 다룬 어떤 신학적 주제도 사랑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바르게 관찰하였다. 웨슬리에게 신자의 구원과 이웃에 대한 섬김은 하나님의 사랑, 신자의 하나님 사랑, 그리고 신자의 이웃 사랑의 관계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 관계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은 인간의 모든 사랑을 일으키는 원천이자 원인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적인 사랑으로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결과로서 가능한 사랑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세 사랑의 관계를 하나님의 창조 사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유지되고 보존되는 질서, 인간이 죄와 이기심을 극복하고 타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서로를 돌보아야 할 상호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반드시 힘써야 할 영적, 윤리적 실천 등을 이해하는 핵심요소로 바라보았다.

i. 하나님의 사랑과 창조세계의 질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본성으로서 사랑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근본적인 목적 및 창조 세계의 질서를 이해하는 열쇠로 보았다. 하나님은 사랑의 교제를 목적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특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같은 존재, 즉 사랑이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며,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존재, 즉 “신의 본성에 참예하는 존재” (벧후1:4) 이다.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관계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다스리시고 보존하시는 방법과도 관계된다. 웨슬리는 플라톤의 존재의 사슬 (chain of being) 개념을 빌어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각각의 위치와 가치를 가지되, 각 개체는 전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서 다른 피조물들에 유익을 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존재의 사슬 중에 특별히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위치시키셔서 세상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하나님과 동역하는 존재로 삼으셨음을 웨슬리는 중요하게 가르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인간의 역할은 사랑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다른 피조물로 흘려 보내는 역할로서, 이 역할은 사람과 사람 간에도 해당된다. 즉, 동료 인간에 대한 인간의 역할 역시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의 매개자가 되어 서로를 보살피고 돕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간 사회는 상호 책임과 사랑의 관계로써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창조세계와 사회의 구조를 만드신 의도를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인간 사이에서만 사랑의 관계를 이루려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모든 피조물들 사이, 무엇보다 인간 상호간에도 거룩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려 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데 천사나 사람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 전 세대에 걸쳐 사람과 천사의 사역을 사용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시는 것보다 사람으로 사람 돕기를 기뻐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분명히 시간과 영원 속에서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시기 위해 상호 선한 사역으로 서로 사랑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즉 우리가 ...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 [서로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증진시켜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서로 만날 때 엄청난 행복을 북돋우고자 함입니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자들인 루터나 칼빈 못지 않게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능력을 가르쳤다. 하나님은 창조, 보존, 구원, 섭리 등 모든 일에서 자족성 (self-sufficiency) 을 가지신 분이시다. 다만, 웨슬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자족성이 인간의 책임성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가르치고자 노력하였다. 사랑의 본성을 가지신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능력만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을 피조물을 향한 사랑 및 피조물들 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당신의 뜻에 맞게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끼리도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피조물 사이에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직접적, 결정적, 일방적인 방법으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해 간접적, 허용적, 종합적으로도 일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불행과 고통의 책임을 하나님의 예정 또는 이웃의 죄악이나 나태함 등으로 돌리면서 이웃의 짐을 져주는 데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회를 돌보시는 하나님 사역의 도구임을 깨달아 보다 능동적으로 타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사람을 돕게 하시는 섭리에 의해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바르게 아는 그리스도인, 특히 성화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들임을 강조하였다.

ii. 율법 순종과 창조질서의 회복

웨슬리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각 사람이 타인에 대하여 상호책임과 사랑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율법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를 깨달음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맡기신 사명과 책임을 발견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의무로 보았다. 웨슬리에게 있어 율법의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과 인간과 하나님의 다른 피조물들 사이의 바른 관계의 법이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율법의 기원, 본성, 속성 및 용법”(1750) 이라는 설교에서 율법의 도덕적 속성을 정의와 의로움 등으로 설명하는데, 그 이유를 율법은 “모두에게 의당 돌아가야 할 것을 돌려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율법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과 관련하여 무엇이 옳으며 무엇을 마땅히 행하고 말하고 생각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규정하여 줍니다.” 도덕적 속성인 정의, 의로움 등을 율법으로 돌리는 것은, 율법이 그 본성상 관계적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관계를 위한 법으로서, 율법은 그 명령의 모든 대상 및 그 대상이 관련된 모든 관계들과 잘 조화를 이룬다. “율법은 온 우주의 본성과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있는 개체들의 본성과도 잘 어울린다 ... 율법은 명령의 대상들과 조금도 충돌하지 않으며 ... 율법은 [그 대상과 목적에 대한 고려 없이] 독단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웨슬리는 율법을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불변의 법칙”, “최고의 불변하는 이성이자, 변할 수 없는 공정성,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창조된 모든 사물에게 영원히 적합한 적합성” 이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율법은 “사물들의 본성과 적합성, 그리고 그들 상호간의 본질적 관계에 의존”하므로 모든 대상, 모든 관계, 모든 상황에서 의롭고 바르고 적합한 명령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웨슬리는 이 세상의 질서도, 그 질서에 부합하는 율법도 모두 동일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모든 것들의 구성 요소를 모든 원자 (atom) 까지도 정확히 들여다보시고 아시며, 그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또한 그 모든 피조물의 특성과 피조물들간의 관계를 정확히 아신다. 그 만드신 대상과 그 모든 관계를 정확히 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바로 율법을 주신 분이시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상의 질서에 부합하는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모든 존재들의 모든 속성을 보시고 아십니다. 그는 그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서로 의존하고 있는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 서로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아십니다. 특히 그는 하늘 위와 땅 아래 생명 없는 모든 무생물들을 보십니다. 어떻게 하늘 위의 별들과 혜성들과 행성들이 지구 상에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아시고, 대기 중 낮은 곳에 있는 것들이 불과 우박과 눈과 수증기와 바람과 폭풍으로 우리의 행성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아시며, 지구 속에서 불과 공기와 물이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지 아시며, 거기서 무엇이 발산되어 어떤 변화를 가져오며, 모든 광물과 식물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아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주의 창조주와 보존자이신 하나님께 낱낱이 드러나 있습니다."

율법의 타당성은 모든 피조물의 특성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아시는 전지하신 창조주께서 그들의 본성 및 관계에 가장 적합한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율법은 그 원천이신 하나님의 본성과 다르거나 이질적이지 않고 둘은 정확히 일치한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처럼 선하여서 모든 죄와 악으로부터 깨끗하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것처럼, 율법은 사랑을 명령한다.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덕과 지식과 찬양할 만한 것들이 율법 속에 들어있다. 따라서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행하는 것의 열매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확신이다.

세 존재 즉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세계,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은 모두 거룩한 사랑이라는 요소에서 일치한다. 하나님이 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세계는 의와 사랑의 세계이며, 율법은 의와 사랑을 명령한다. 이 점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이 가지신 “덕과... 지혜와 지식과 사랑”을 개인뿐만 아니라 이 사회와 세계 속에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어, 사람의 성품을 온전하게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 개인과 사회의 행복을 증진시킬 것이다. 동시에 율법은 인간과 사회의 죄를 드러내고 정죄함으로써 죄에 대한 회개와 변화를 요구하는 “죄의 원수” 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으로 창조되어 율법과 일치하는 의롭고 선한 세계와 죄의 결과로 무질서해지고 악해져서 율법을 깨뜨리는 세상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웨슬리는 타락 이전 하나님과 인간, 피조물의 관계 및 구원 이후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시려는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 속에 있다고 가르친다.

더 나아가 웨슬리에게서 율법과 복음 모두는 하나님의 은총과 관련된다. 하나님 본성 사랑에서부터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도, 신자의 삶을 인도하여 의와 사랑으로 회복시키시는 율법도 나온다. 죄를 멀리하고 의와 사랑을 이루는 율법의 성취는 값없이 사랑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즉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 가능하므로, 복음은 율법을 폐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한다. 성령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시면 (롬 8:16) 신자는 그 순간 율법의 참된 의미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 율법을 지켰을 때의 결과 역시 의와 사랑임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믿음은 율법의 근원 역시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게 하여 순종케 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인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으로의 자유를 의미한다.

율법을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율법에 순종하는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율법은 오직 인간의 죄를 드러낼 뿐이라는 일반적인 개신교들인이 가진 부정적 율법관은 신자의 거룩한 삶과 창조의 질서회복을 위한 성경적 율법의 용도를 바르게 포함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Albert Outler는 웨슬리의 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비전을 재천명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각자의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하여 그 삶을 “모든 사물의 영원한 적합성” 위에 세워나간다면, 그것은 개인이 의와 사랑을 회복하게 되는 개인적 성결과 행복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만드신 세상을 의와 사랑으로 회복시켜 세상을 갱신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된다. 율법은 그것이 성취되면 세상이 어떠할지를 서술의 형식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성취되어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 명령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하나님과 그의 만드신 세상과 율법의 완전한 조화로 설명될 수 있다면, 율법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그 조화를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자, 최초의 그 조화로 세상을 되돌리는 수단이 된다.

웨슬리의 이해에서 죄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라면, ‘개인의 죄가 다수의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면 사회적 죄가 된다.’ 따라서 각 개인이 다른 사람과 어떤 상호작용을 하면서 사느냐 하는 것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의 핵심을 형성한다. 사회적 악의 해결은 먼저 개인들로부터 죄를 극복하고 제거하는 것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사회 문제 해결의 영적 토대가 되는 것이 바로 개인들이 하나님의 성결의 은혜를 받는 것이다. 웨슬리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이름으로 인간 삶에 만연한 수많은 사회적 악을 적극적으로 비난하고 바로잡고자 했던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사회 윤리란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성화의 사회적 적용이자 확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화된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의를 통하여 세상의 불의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 각 사물의 가치와 서로간의 바른 관계, 이웃에 대한 상호책임과 의무, 따라서 대신 대인 대물 관계에서 정의와 사랑을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명령한다. 문제는 개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느냐 못하느냐, 그리고 그 율법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정의와 사랑이 실현될 가능성과 깨어질 가능성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부자에게 쓰고도 남을 잉여의 재산을 주시면서, 그와 동시에 “가난한 자를 먹이라”는 율법을 함께 주신다. 인간이 이 율법의 명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돌보시는지를 깨닫고 명령에 순종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긍정적으로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랑의 마음으로 순종하는 자를 통해 가난한 이를 먹이실 가능성과, 부정적으로 부자의 불순종으로 그들이 가난한 자의 몫 독식할 가능성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개인이 자신을 향한 율법의 명령이 공의와 자비임을 깨닫고 순종한다면,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사회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실현될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로우시고 은혜로우신 뜻에 의해 이 땅에서 공의를 실현하고, 상처받은 자를 변호하고, 범죄자를 형벌하는 일을 위해 보냄 받은 자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들은 우리의 선을 위하여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일꾼이며, 공공의 평안을 유지하는 자들이며, 선량한 시민의 보호자, 사회복지를 지키는 인물들입니다 ... 당신들은 그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여야 하며 ... 주님처럼 왜곡되고 치우침 없이 공의를 지키되 자비와 긍휼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불의를 미워할 것이며 ...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함이 있어야 하며 ... 후일에 하나님으로부터 ... 칭찬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웨슬리는 이 세상의 불행과 불운의 많은 경우를 하나님 명령을 받은 자들의 태만과 불성실에 의한 것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청지기 의식과 관련하여 우리가 가진 재물을 하나님의 뜻과 반하도록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해서는 안됨을 경고하였던 웨슬리는, 사회적 불의의 희생양이 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불행을 하나님께 원인이 있는 것으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불의와 이웃을 돌볼 의무의 불이행 등으로 발생한 불행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자기 부인을 하지 않고 청지기 직분을 바르게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의 율법의 명령을 알고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로 인한 것이다. 사회적 고통과 불의의 책임이 이웃을 책임지지 않는 인간에게 있음을 말하는 웨슬리의 고발은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 및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재능과 사명에 적용된다. “당신이 당신의 의복에 더 많은 돈을 사용할 수록, 당신은 헐벗은 사람들을 입히고,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아픈 자와 갇힌 자를 위로하며, 이 눈물의 골짜기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수 없는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쓸 돈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필요 없이 당신의 의복에 사용해버린 돈은 사실상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가난한 자들로부터 훔친 돈입니다.” “그날에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 그 때에는 우리에게 부여된 재주와 몸과 재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낱낱이 진술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명령에 순종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 및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사회적 성결과 행복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충만한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대리자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는, 웨슬리가 가르친 인간의 참 모습에 대해 Randy Maddox 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웨슬리의 인간론은 인간의 네 가지 기본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 타인과 다른 피조물과 나 자신과의 관계를 인식한다. 거룩한 (그리고 온전한) 사람은 이 모든 관계를 바르게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영원히 향유한다. 타인은 사랑으로 섬긴다. 다른 피조물은 사랑으로 보호한다. 이 모든 관계가 적절해지면, 우리는 자신을 용납할 수 있게 되어 자기 자신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

iii.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믿음과 사랑

웨슬리는 인간의 구원 및 구원받은 신자의 삶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본성 속에는 죄로부터의 분리와 정결을 의미하는 거룩 및 죄인의 용납과 교제를 의미하는 사랑의 요소가 분리될 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은혜라면, 이 은혜는 무정형의 (amorphous) 은혜가 아니라 기준이 있는 은혜 (normed grace) 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의한 구원은 단순히 죄 용서로 끝나지 않고 신자 자신의 거룩함으로의 변화를 포함하며, 이 변화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호의를 베푸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령으로 거룩한 삶의 능력을 부으신다. 하나님의 은총은 값없이 주시는 은총인 동시에 신자로 하여금 그 은총에 반응하고 참여하도록 하신다. 따라서 구원은 성도의 성품과 삶의 변화를 포함하며, 지향하며, 또한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서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변화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더욱 완성시켜 나아가야 할 구원의 목표로서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된다. 웨슬리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그 마음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심겨짐과 동시에, 신자는 하나님의 본성, 거룩한 사랑을 본받아 거룩한 사랑에 힘쓰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수로 보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개신교의 “오직 믿음”에 대해 질문하기를, 믿음이 가치에 있어 사랑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인가? 라고 묻는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를 나무와 열매의 관계로 설명하였다. 나무는 열매를 위해 존재한다, 즉 믿음은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

"선행은 기독교신앙의 완성입니다 …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은 기독교신앙의 최고봉입니다. 우리 주님은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15:8) 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열매! ... 나무가 존재하는 것은 열매 때문 아니겠습니까? 열매를 맺음으로써만 나무는 그것이 심겨진 목적을 최대한으로 성취합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이라 불린다는 사람이 선행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를 진실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웨슬리는 죄 용서를 받았다는 신앙의 안도감이 가져오는 태만과 방종이라는 잘못된 결과를 피하고자, 구원을 사랑이 회복된 상태로 설명하였다.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순수하고 깨끗하고 오염되지 않은 예배”가 된다. 사랑은 이웃에 대해 황금률을 이룬다. 또한 모든 피조물을 대할 때에도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범을 따르게 된다. 즉, 구원의 상태를 하나님, 인간, 타 피조물 사이의 의와 사랑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기독교의 목적이고, 축복이고, 내용이다. 웨슬리는 신자가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은총은 “우리의 성품과 말과 행동에까지 나타나도록 우리 마음과 삶을 지배하는 순수한 사랑의 선물”이라고 가르친다.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웨슬리는,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목적”이라면, 신앙은 사랑을 신자에게 회복시키기 위한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신앙을 통해서이므로 사랑은 그 존재를 믿음에 의존하지만, 가치에 있어서는 사랑이 믿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신앙을 우위에 놓는 것에 반대하여 웨슬리는, “신앙은 사랑의 법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믿음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의 가치를 보여주고, 믿음을 정당한 위치 내에서 높이며,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믿음에 할당하신 그 자리에 믿음을 두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믿음이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 신앙의 영광은 사랑을 일으키는 데 있다. 믿음은 “사랑의 시녀”일 뿐이다. 의와 사랑, 선행, 성결은 참 신앙의 시금석이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사랑이 믿음의 주이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존 웨슬리의 사회적 성결, 사회적 복음 등의 개념에 나타난 “사회”의 개념을 정의한 후, 그가 가르친 그리스도인의 개인 윤리 및 메소디스트 운동이 앞장 서서 참여하였던 사회를 위한 헌신, 그리고 사회활동의 근거가 되는 그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이었는지 고찰함으로써 존 웨슬리의 사회사상을 살펴보았다.

웨슬리와 메소디스트 사회운동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자각에서 생겨나는 이웃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앙은 반드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열매를 맺고 표현이 될 때 그 진실성이 입증된다. 만약 스스로는 구원의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해 아무런 열매가 없다면, 웨슬리는 그 믿음의 진실성을 의심하거나 그 믿음을 아주 연약한 믿음으로 보았다. 구원의 열매인 사랑을 통하여 구원의 뿌리의 진실성과 건전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동시에 웨슬리는 약2:22절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라는 말씀대로, 성도의 행함이 연약한 믿음을 강화시키고 온전케 하는 통로가 됨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키는 은총의 수단에는 기도, 성경연구, 성찬, 금식, 성도의 교제, 계명 준수, 자기 부정, 매일 십자가를 짐, 그 외에도 개인적 필요에 따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특정한 실천을 통한 경건의 일들 (works of piety) 이 포함된다. 경건의 일들은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바른 성품과 태도를 함양하는데 도움을 주고, 신자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가도록 도움을 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믿음을 강화시키는 또 다른 은총의 수단으로서 웨슬리는 이웃에게 베푸는 자비의 일 (works of mercy) 을 중시하였다. 웨슬리는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비의 일에 참여하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수단이 되고 타인을 향한 사랑을 더 깊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고 가르쳤다. 예로, 아픈 사람을 방문하는 사람은, 자신의 건강에 대해 특별한 감사를 느끼게 되며 또한 고통 받는 자에 대한 더 큰 동정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는데, 아픈 사람을 방문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이러한 은총은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동정하지 못하는 가장 단순한 이유가 그들을 방문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궁핍한 자를 무시함으로써 부자들에게서 은혜는 소멸되고 그들은 점점 방종하게 된다. 따라서 자비의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자,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거나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웨슬리는 이웃에 대한 자비의 일을 두 가지, 세상적 필요를 채워주는 육적 자비의 일과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영적 자비의 일로 나누어 설명하기를, 두 자비의 일 중 가치 순위에서는 영적 자비의 일이 앞서지만, 시간 순위에서는 육적 자비의 일이 앞서야 함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물론 이웃에게 육적 자비를 실천하면 그들에게 영적 자비를 행할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됨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할 수 있는 대로 육적 자비만이 아니라 영적 자비를 베풀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웨슬리에게서 이러한 강조는 이웃에게 베푸는 선행을 미끼로 그들을 전도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사람들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참으로 사랑의 하나님인지를 확신할 수 없게 되어 결국에는 복음 전파의 장애물이 되는 경향에 반대하여, 웨슬리는 육적 자비의 일에 힘쓰는 일은 참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가능하며, 더 나아가 그 일이 복음의 신뢰성을 드러내어 광범위하게 퍼진 복음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웨슬리는 사회적 복음, 사회적 성결에 대한 비전을 자신의 율법관을 통해 드러내었다. 이는 율법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다고 하는 개신교의 부정적 율법관을 극복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개인적 의와 사랑의 실천뿐만 아니라, 사회를 의와 사랑으로 회복하는 데 있어서도 필수적인 요소임을 인식한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하므로 개인의 성결의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부합하므로 사회의 정의와 사랑의 회복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은 따라서 개인적 성결과 사회적 성결 회복을 위해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율법이 명령하는 의와 사랑의 실천 – 자기 부인과 선한 청지기 직분, 경건의 일과 자비의 일, 영적 자비와 육적 자비의 일 – 등을 통하여 한국교회를 진단해 본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의 일 및 이웃을 위한 자비의 일 중 영적 자비의 일에 대한 실천은 중시하면서도, 자기 부인과 선한 청지기 의식을 통한 이웃에 대한 자비의 일을 은총의 수단이자 참 신앙의 열매로서 소중히 여기고 행하는 일에 대한 강조와 실천은 부족하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웨슬리가 우려한 대로 루터의 종교개혁적 강조점인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율법무용론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존 웨슬리의 사회사상은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에 확고히 뿌리를 내려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서 이웃의 영육간의 복지를 돌보는 사랑의 열매를 맺을 때 우리의 믿음이 성경적인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우리의 신앙의 뿌리와 열매를 점검할 것을 도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