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가 극복해야 할 종교개혁 신학

1. 율법의 평가절하에 대한 웨슬리의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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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영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주적은 로마 카톨릭의 율법주의(행위구원 사상)였기에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율법 폄하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어느 정도"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많은 한국 개신교인은 여전히 16세기의 마르틴 루터, 심지어 루터의 신학을 더 극단적으로 적용한 아그리콜라 식 율법무용론적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개신교회가 율법과 복음의 바른 균형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신학적 발전의 과정은 3단계입니다.

1. 율법의 역할을 "정죄"로만 제한해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이해하는 단계, 즉 루터 신학.

2. 율법이 신자의 성화의 과정에 도움을 주는 유익한 도구가 됨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을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로 묘사해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두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상으로 여기는 단계, 즉 칼빈 신학

3.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요일 3:8)이며,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라는 말씀처럼, 주님이 오신 것은 율법 깨뜨리는 죄 (죄=불법을 행함 = lawless 또는 transgres-sion of the law 즉 율법을 범함) 를 멸하시기 위함임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라는 말씀처럼, 신자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순종 속에 거하는 것, 다시 말해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마땅하고, 또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는 있는 한 “범죄하지 못하는 것”이 마땅함을 강조하는 단계, 즉 웨슬리 신학.

참고로 웨슬리에 의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하는 사람은 범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범죄하지 못한다고 말씀할 때 “범죄하지 못한다”는 말씀의 바른 의미는 impossible to sin (다시 타락해 범죄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 가 아니라, 믿음과 순종 속에서의 possible not to sin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이기므로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을 의미합니다.

아래의 글은 16세기 당시 배경에서는 “어느 정도”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으나, 오늘날 개신교인이라면 더 이상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극복해야 할 루터식 율법 폄하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내용상 구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가치의 우열로도 구분했다. 비록 율법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 복음을 돕지만, 정죄할 뿐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율법의 역할은 부정적이라면, 구원을 위한 긍정적 역할은 언제나 복음의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 〮 부정적 역할의 구분이 가치의 우열로 연결된다. 루터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과 성취의 관계로 보아, 구약의 가치를 “신약의 복음의 토대와 증거”가 된다는 사실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최고의 것”, “가장 중요한 것”, 연약한 신앙을 북돋우는 가장 “탁월한” 내용으로 묘사했다. 반면 율법에 관해서는 심지어 신약성경에 있는 것이라도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그 예로, 루터는 “신약성경에 붙이는 서문”(1522)에서 요한복음과 바울 서신 특히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및 베드로전서를 “복음의 진정한 성격”을 가진 “성경의 모든 책 중 가장 중요한 핵심과 골수”로 평가했다. 반면 “야고보서는 참으로 지푸라기 서신에 불과하다. … 거기에는 복음의 성격이 전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평가절하했다. 같은 해에 쓴 “야고보서 서문”에서는 야고보서가 행위 구원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그 정경성을 부인했다.

(인용구, 루터) “나는 야고보서를 사도가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첫째, 야고보서는 칭의의 원인을 행위로 돌려, 사도 바울이나 성경의 다른 책과 반대되는 내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행위 때문에 의롭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약 2:21), 사도 바울은 반대로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기 전에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만으로 이미 의롭게 되었다고 가르쳤다(창 15:6). … 이런 오류는 야고보서의 저자가 사도일 수 없음을 증명한다. 둘째, 야고보서는 …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그리스도의 영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할 때조차도 그리스도에 관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일반적인 신앙만 언급한다. … 참된 사도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직분을 설교해 그를 믿는 신앙의 기초를 놓는 것이다(요 15:27). … 모든 책의 사도성을 판별하는 참된 기준은 그리스도를 가르치는지 아닌지의 여부다. …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외에 어떤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전 2:2). … 그런데 야고보서는 사람을 율법과 행위로 몰아갈 뿐이다. … 따라서 나는 야고보서를 성경에 포함시킬 수 없다. 그 속에 많은 좋은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비록 다른 사람이 성경에 포함시키거나 극찬하더라도 그것을 막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혹자는 루터가 1522년 “야고보서 서문” 이후 “지푸라기”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가 야고보서에 관해 의견을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 마이클 루(Johann Michael Reu)는 그런 주장이 잘못임을 입증했다. 루터는 1532년 『탁상담화』에서 “많은 사람이 야고보서와 바울 서신을 조화시키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그러나 신앙이 의롭게 한다는 것과 의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이 둘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내 박사모를 내어주고, 나는 기꺼이 바보로 불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1540년에는 “오직 교황주의자만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 야고보서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내 의견은 야고보서가 사도의 글일 수 없다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신앙을 육체로, 행위를 영혼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야고보서를 불쏘시개로 사용할 것이다”라는 극단적 평가를 내린다. 1542년에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용구, 루터) “우리 비텐베르크 대학은 야고보서를 추방해버려야 한다. … 야고보서는 시작 부분[약 1:1; 2:1] 외에는 그리스도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야고보서는 아마 그리스도인에 대해 들었으나 만나보지 못한 어떤 유대인이,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대단히 강조한다는 말을 듣고 ‘잠깐, 내가 그들을 반대해 행위를 강조해야겠다’고 생각해 썼을 것이다. 야고보서 저자는 … 사도들의 설교의 초점이었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쓰지 않았다.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 이 얼마나 끔찍한 대조인가! 믿음을 영혼에 비유했어야 마땅함에도 몸에 비유하다니!”

루터는 1543년에 “우리 비텐베르크 대학에서는 야고보서를 거의 성경에서 빼버렸다”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 전인 1534년에 야고보서를 성경 목록에서 제외해 구약 외경 목록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루터의 야고보서 폄하가 스스로의 정경 판단 기준에 따라 야고보서의 정경성을 신뢰하지 못한 결과이고, “야고보서를 요한복음, 바울 서신, 베드로전서와 비교하는” 문맥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감안해야 한다는 루터의 주장을 십분 인정하더라도, 루터가 복음의 가치는 높게, 율법의 가치는 낮게 평가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기 힘들다. 루터는 “참된 복음” 즉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어떻게 죄와 죽음과 지옥을 이기고 생명과 의와 구원을 주는지”를 설명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따라 사도, 심지어 그리스도의 사역, 선행, 율법에 대한 가르침도 가치를 평가절하했다. 루터가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율법을 폄하한 것은, 율법은 신자가 내적 의로움에서 진전하도록 돕지 못하고 단지 죄인이 그리스도를 찾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율법의 가치와 효용은 언제나 복음을 의존하며 복음에 부수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용구, 베른하르트 로제) “율법은 그 기능을 통해 칭의에 기여한다. 이는 율법이 의롭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을 은혜의 약속으로 몰아가 은혜의 약속이 달콤하고 열망할 만한 것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폐하지 않는다. 우리는 율법의 진정한 기능과 용법을 가르친다. 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몰아가는 가장 쓸모있는 종이다. 율법이 당신을 겸손하고 두렵게 하며 완전히 부수어 당신이 절망 직전에 이르면, 당신은 어떻게 율법을 사용해야 할지 바르게 알아야 한다. 율법의 기능과 용법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께 몰아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베른하르트 로제(Bernhard Lohse)가 지적한 것처럼, 칭의의 “효과적 원인”은 아니더라도 칭의를 일으키는 “실질적 촉매제”가 되기에, 루터는 율법 자체를 결코 폐기하지 않는다. 복음이 참으로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죄인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돕는 필수적 요소,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이 제거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루터가 종교개혁 진영 내부에서 일어난 율법무용론자를 반대한 것은 그들이 복음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율법의 필요성을 부인해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루터가 특히 종교개혁 초기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서 율법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에서 “그리스도인은 구원 받기 위해 어떤 행위나 율법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앙을 통해 그는 모든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유로이 행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은 모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1525)라는 설교에서는 “우리는 모세의 명령을 따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세는 죽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의 다스림은 끝났다. 그는 이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심지어 십계명도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도 주장했다. 루터의 이런 발언은 그의 추종자 요한 아그리콜라(Johann Agricola)를 포함해 많은 사람에게 율법무용론적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필립 멜랑히톤은 1527년 “오늘날 많은 사람이 신앙과 죄 용서는 가르치면서도 회개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회개 없는 신앙은 한낱 몽상에 불과하다”는 말로, 아그리콜라를 포함해 루터의 가르침을 왜곡한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했다.

아그리콜라는 루터의 초기 가르침에 기초해 구원에서 인간 행위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것을 돌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죄인이 율법에 기초해 회개한 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면, 회개하는 인간의 역할이 구원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된다고 보았다. 이에 “아그리콜라는 구원을 위한 관심이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초점을 두도록 하기 위해 신앙에서 모든 부차적인 것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즉 행위가 아닌 신앙만이 구원하고, 행위가 아닌 불신앙만이 멸망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그리콜라는 심지어 “여러분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죄 속에서도 거룩하다” “죄를 짓더라도 행복해하라. 죄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만약 여러분이 매춘부, 불량배, 간음자 같은 죄인이라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 “여러분이 죄에 깊이 빠져 있어도, 여러분이 믿는다면 여전히 축복 속에 있다” 등의 극단적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제프리 만(Jeffrey K. Mann)은 아그리콜라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율법은 죄인의 회심에 아무 역할도 할 수 없고 … 잔인한 심판자로 보이는 하나님에게서 죄인을 더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 설교자의 임무는 율법이 아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신앙을 갖는 데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율법은 필요하지 않다. … 기독교는 복음의 메시지로만 이루어지고, 율법은 전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루터는 이러한 율법무용론을 바로잡기 위해 1538년에 “우리는 종교개혁 초기, 복음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오늘날 율법무용론자들이 인용하는 말을 사용하곤 했다. 그러나 그때 상황은 오늘날과 상당히 달랐다”며 자신을 변호했다. 즉, 중세 가톨릭의 율법주의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이 종교개혁 초기에 강조한 극단적 표현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부득이함과 상황적 정당성이 있었음에도, 율법무용론자들은 당시의 문맥과 루터가 바로잡으려 했던 오류가 무엇이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루터의 말을 잘못 인용해 그 의도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루터는 자신이 종교개혁 초기에 율법을 강하게 반대한 이유는 교황주의자들이 율법주의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율법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한 적은 없었다고 항변했다. 또한 “마귀는 율법이나 죄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쳐 거짓되이 구원을 보장하는 일에 열심을 다한다. … 거짓된 구원 보장의 달콤함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지옥에 빠지게 하기 위해서다”라는 말로, 율법무용론에 빠진 사람이 처한 위험을 경고했다. 루터는 “율법무용론자들에 대한 반대”(1539)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율법무용론을 반박했다.

(인용구, 루터) “율법과 양심이 없다면 죄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죄와 율법을 알지 못하고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고난을 왜 받으셨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곳이면 어디서든 율법도 설교해야 한다. 심지어 ‘율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리스도께서 엄청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위해 율법을 성취하셔야 했다는 사실을 들을 때 우리 양심은 공포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어떤 이는 결코 폐기할 수 없고, 폐기하려 하면 더 강력해지는 율법을 왜 폐기하려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엄청난 고통에 침묵하면서 위협하는 것보다, 성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감내하시면서도 율법을 성취하셔야 했다는 사실을 들을 때 율법은 더 나를 두렵게 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저 말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알려주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에서 나는 하나님의 진노가 활동하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본다.”

이 주장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 율법이라는 기준이 있어야만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에, 율법은 죄 용서로서의 복음의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생애가 율법에 대한 순종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죽음이 율법의 형벌을 담당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율법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의 복음적 의미를 드러낸다. 셋째, 율법은 말씀의 형태로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형태로든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어 이를 해결하는 복음을 두드러지게 한다. 넷째, 율법은 불신자만이 아니라 신자에게도 복음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밝혀준다. 마크 에드워즈(Mark U. Edwards Jr.)는 아그리콜라와 루터의 주된 논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아그리콜라는 복음의 용서를 통해 회개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데 반해, 루터는 복음을 통한 죄 용서 이전에 율법을 통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그리콜라는 복음만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은혜 모두를 충분히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한 데 반해, 루터는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는 것은 율법,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은 복음이라고 반박했다. 아그리콜라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로도 사람은 충분히 두려움에 빠지므로 율법 설교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고 주장했으나,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가혹한 고통이 인간의 죄가 얼마나 중대한지를 드러내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설교자는 여전히 율법을 단호히 설교해야 하고 죄인은 여전히 율법을 통해 자기 죄를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루터는 신자라도 죄인인 이상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달아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기에, 구원 전이든 후든 율법이 결코 폐기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M. 홉슨 부토트(M. Hop-son Boutot)는 “루터는 어떻게 설교했나?”(How Did Luther Preach?)라는 논문에서, 루터는 설교자가 율법을 설교할 때 “성경 본문의 의미에 충실하게” 설교할 뿐 아니라, “죄인을 두렵게 할 만큼 단호하게”, 청중이 누구인가에 따라 “신중하게” “일관되게 자주” “때때로 모범을 제시하거나, 특정한 행동 방식을 지시하고 권면하는 등 … 다양한 방법으로” “율법의 뜻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면서”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담대하게” 설교해야 함을 가르쳤고, 실제로 루터 자신도 그렇게 설교했음을 밝힌다.

그럼에도 부토트는 그렇게 율법을 설교할 때조차 루터는 언제나 “복음이 지배적 중심이 되게 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주지시킨다. 에드워드 엥겔브레히트(Edward A. Engelbrecht)는 루터의 설교에서 복음이 지배적 중심이 된다는 말은, “율법이 복음,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 용서와 생명 구원을 가리키도록” 설교했음을 의미한다고 그 뜻을 명확히 한다. 제프리 만 역시 2,300편이 넘는 설교에서 루터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은혜에 무관심했던 로마 가톨릭 신학”을 바로잡기 위해 구원과 선행에서 인간의 영적 〮 도덕적 무능력과 “그리스도의 복음의 충분성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고 지적한다.

루터는 언제나 율법과 복음 모두를 설교해야 함을 강조했음에도 그의 실제 설교는 우리가 예상한 것처럼 율법과 복음의 적절한 균형을 보여주지 못했다. … 그가 언제나 우선순위에 둔 것은 로마 가톨릭의 율법주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루터가 생각하기에 지난 수세기 동안 가톨릭의 율법 강조는 이미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에, 교회에 율법과 복음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복음을 훨씬 더 강하게 처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율법무용론자들의 오해와 달리 루터는 율법의 필요성을 결코 부인한 적이 없다. 둘째, 그럼에도 율법무용론 논쟁이 있기 전 루터는 은총과 복음에 대한 강한 강조로 인해 율법무용론 주장으로 오해받을 표현을 사용한 것이 사실이다. 율법무용론자와의 논쟁은 제프리 만이 지적한 것처럼, “루터로 하여금 자신이 과거에 사용한 표현을 재확인하고 그 뜻을 명확히 해 오해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율법무용론자와의 논쟁은 루터로 율법무용론적 표현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기여한 점에서 “하나의 변장한 축복”과도 같았다. 그러나 제프리 만의 주장처럼, 루터가 과연 종교개혁 초기에만 율법무용론적 표현을 사용하고 이후에는 그러지 않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루터의 무르익은 종교개혁 사상이 표현된 1535년의 『갈라디아서 강해』에서도 유사한 표현과 강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셋째, 루터가 율법과 복음의 균형을 강조했더라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실제 사역에서 그의 메시지는 언제나 가톨릭의 율법주의를 바로잡기 위해 복음을 지배적으로 강조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넷째,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과 관련해, 루터는 아그리콜라와의 율법무용론 논쟁에서 구원 이전과 이후 모두에서 율법의 유효성을 확고하게 주장했지만, 그가 가르친 율법의 역할은 신학적 용법, 즉 죄를 정죄하는 역할에 국한되었다. 루터의 율법관은 언제나 율법의 정죄와 복음의 용서라는 변증법을 벗어나지 않았다.

 출처: 장기영, 『개신교 신학의 양대 흐름: 루터 신학 vs 웨슬리 신학』 (부천: 웨슬리 르네상스, 2019), 162-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