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체험

 

1738년 5월 24일 웨슬리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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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영  옮김

 

 

1. 나는 약 열 살이 될 때까지는 세례 시에 성령께서 깨끗하게 씻어주신 그 상태를 상실할 정도의 죄를 짓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엄격하고도 주의 깊게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모든 면에서 순종할 때에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배워왔고, 그 의미를 부지런히 되새기도록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외적인 의무와 죄에 관한 가르침을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그 가르침을 자주 되새겼다. 그럼에도 나는 내적 순종과 성결에 관해 배운 모든 것을 나는 이해하지도 못했고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하여 무지한 것처럼 율법의 참된 의미에 관해서도 정말로 무지했다.

2. 그 다음 6-7년 동안 나는 기숙학교에서 살았다. 그곳에서는 외적인 제약들이 사라졌다. 전과 비교하면 외적인 의무에 대해서마저도 많이 소홀해졌다. 나는 거의 계속해서 외적인 죄를 범했는데, 세상 사람들에 눈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성경을 읽었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통해 구원 받기를 원했다. 1) 다른 사람들만큼 나쁘지는 않으므로, 2) 기독교에 대해 여전히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므로, 3) 성경을 읽고, 교회에 가고, 기도를 드림으로.

3.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5년을 다녔다. 나는 여전히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기도를 드렸다. 성경과 함께 경건서적을 많이 읽었고, 특히 신약성경을 설명하는 책들을 읽었다. 그러나 그러는 중에도 나는 여전히 내적 성결에 대한 개념을 잘 알지 못한 채 죄라고 알려진 일들을 습관적으로 행하면서도 만족해 했다. 일 년에 세 번 의무적으로 받도록 되어 있는 성만찬 이전과 이후에는 어느 정도 죄를 절제하고, 죄와 씨름하기도 했다. 그 당시 나는 내 안에 있었던 희미한 빛에 대항해 계속 죄를 범했기 때문에, 많은 목회자가 회개라고 불렀던 일시적인 변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 때 내가 무엇에 의해 구원을 받고자 했는지 지금은 정확히 말할 수가 없다.

4. 내가 22살이 되었을 때 내 아버지는 내가 성직 임명을 받을 것을 강하게 권고하셨다.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는 나로 하여금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게 하셨는데, 나는 이 책을 통해 참된 종교는 마음 속에 자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말과 행동만이 아니라 모든 생각에까지 관련됨을 알게 되었다. 비록 내가 딘 스탠호프(Dean Stanhope)의 번역본을 읽긴 했지만, 나는 켐피스가 지나치게 엄격한 것에 매우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는 자주 켐피스를 읽으며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이런 느낌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 나는 이전에는 만나보지 못한 한 경건한 친구를 만난 듯 내 삶의 모든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고, 열정적으로 새로운 삶을 추구했다. 나는 경건의 시간을 갖기 위해 하루에 한 두 시간을 따로 떼어 놓았다. 매 주 성찬에 참여하였다. 말로든 행동으로든 모든 죄를 경계했다. 내적 성결을 목표로 삼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많은 것을 행하고 선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인해, 내가 좋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5.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대학으로 옮기면서, 나는 사소한 일들은 주저함 없이 털쳐버리고, 내가 전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시간의 가치를 점점 더 깨닫기 시작했다. 더 공부에 집중했다. 자범죄를 짓지 않도록 더욱 주의했다. 내가 내 삶에 적용한 신앙의 표준에 따라 다른 사람들도 경건한 삶을 살도록 권면했다. 그러던 중 윌리암 로(Mr. Law)의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과 진지한 부르심(Serious Call)을 읽은 후에는, 비록 그 책들에 관해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높고 넓고 깊은 것인지를 깨닫게 되였다. 내 영혼에 부어진 그 빛은 너무나 강력했고, 모든 것이 새로워 보였다.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했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그런 결단은 이전에는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내적인 법과 외적인 법, 하나님의 율법 전체를 내 모든 힘을 다하여 지키도록 끊임없이 노력함으로, 내가 하나님께 용납되었으며, 심지어 내가 구원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했다.

6. 1730년에는 감옥 방문과 마을의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돕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으로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해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일을 위해 나는 모든 여분의 것 뿐만 아니라 생활 필수품까지도 줄여 나갔다. 나는 곧 그런 이상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수군대는 것으로 인해 오히려 기뻐했다. 다음 해 봄부터는 초대 교회가 일반적으로 지켰던 수요일과 금요일의 금식을 행하기 시작해, 오후 3시까지 아무 음식도 먹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나는 모든 죄에 대항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다. 나는 율법과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한 자신을 부인하기 위한 어떤 실천도 빼먹지 않았다. 모든 기회를 활용해 공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모든 은혜의 방편들을 주의 깊게 활용했다. 그로 인해 고난을 당하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했다. 나는 만약 내적인 성결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있었다. 따라서 나는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형상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런 일 행하기를 몇 년 동안 계속하자 나는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음에도, 그 모든 것은 내게 어떤 위로도, 하나님께 용납되었다는 어떤 확신도 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 때 나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 인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7.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려깊은 사람이 외적인 행함으로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에 대해 내가 전에 확신했던 것 보다 더 깊은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많은 대화를 통해 내가 어떻게 내적 성결과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이룰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 때는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지만) 그의 조언은 1. 외적인 행함을 신뢰하지 말라며 너무도 부주의하고도 부정적으로 말함으로 그 모든 것을 행하고자 했던 나의 의욕을 잃어버리게 하면서, 2 (마치 행위가 줄 수 없는 무엇을 줄 수 있다는 듯) 영혼을 정결하게 해 하나님과 연합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묵상 기도를 강조했다. 그 때부터 나는 과거에 환자를 방문하거나 헐벗은 자들을 입혔던 것만큼이나 그런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고, 또 전에는 다른 방법으로 그랬듯 이제는 그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 나 자신의 의가 되었다.

8. 나는 (많은 신비주의 작가들이 열심히 가르쳐온) 자신의 행위와 자기 의를 신뢰하는 그런 고상한 방법을 오랫동안 지속했기에, 영국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서 어떤 위로나 도움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배에 승선한 후로는 다시 적극적으로 외적인 행위들에 힘썼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값없는 은혜로 26명의 모라비안 형제단을 동반자로 보내주셨다. 그들은 나에게 ‘더 좋은 길’(a more excellent way)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처음에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지나치게 박식했고 지나치게 현명했기에, 그런 것이 내겐 어리석게 보였다. 그래서 누구도 그 방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는 그런 의를 계속 설교하고 추구하고 신뢰했다.

9. 사바나(Savannah)에 있는 동안 나는 내내 헛수고만 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산 신앙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알지 못해 나 자신의 의를 세우려 급급했다. 따라서 나는 그 모든 날 동안 마치 지옥불 속에서 열심히 노력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율법 아래” 있었다. 하나님의 “율법”이 “신령한” 줄 알았고, 율법이 ‘선하다’는 데 동의했다. 그렇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했다.” 그러나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 나는 매일 다음과 같이 외칠 수밖에 없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10. 죄의 노예가 된 이 끔직하고 비참한 상태에서 나는 참으로 끝없이 싸웠지만 이기지 못했다. 이전에 나는 기꺼이 죄를 범했지만, 지금은 원하지 않음에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나는 넘어졌고, 일어난 후에는, 또 다시 넘어졌다. 때로는 죄에 져서 괴로움에 사로잡혔고, 때로는 승리하여 기쁨에 젖었다. 전자의 상태에서는 율법의 공포를 맛보았으나, 후자에서는 복음의 위로를 받았다. 10년 넘도록 본성과 은총 사이에서 이 모든 투쟁을 벌이는 동안, 나는 수없이 간절히 기도했고, 특히 문제를 겪을 때 더욱 그랬다. 나는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위로를 수없이 많이 받았는데, 이 위로는 다른 무엇보다 앞으로 내가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예감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은혜 아래”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 속에 갇혀 살다 죽는 것으로 만족하는) “율법 아래” 있었다. 나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단지 분투하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성령께서 내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증거를 받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믿음으로 그것을 구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로 그것을 구했기” 때문이다.

11. 1738년 1월, 잉글랜드로 돌아갈 때 나는 죽음이 눈앞에 닥쳐온 가운데 심히 불안해 했고, 그 불안의 원인이 불신앙이라는 사실과 “내게 필요한 단 한가지”는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을 갖는 것임을 깊이 확신했다. 그러나 나는 이 믿음을 여전히 올바른 대상에 고정시키지 못했다. 나에게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또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이런 믿음을 전혀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단지 믿음이 충분치 않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런던으로 돌아오자마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피터 뵐러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은 오직 하나이며, 이 믿음에는 반드시 “죄를 이기는 능력과 죄를 용서 받았음을 아는 데서 오는 변함없는 평안”이라는 두 가지 열매가 따른다고 확언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그의 주장을 마치 새로운 복음같이 여겼다. 만약 그의 말이 옳다면 내가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기꺼이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반박했고, 죄를 이길 능력과 죄 용서의 자각에서 오는 평안을 갖지 못했어도 믿음이 있을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와 관련된 모든 성경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 달리 주장하는 장로교인들도 모두 만나 보았다. 뿐만 아니라, 나는 순리 상 누군가가 죄 용서를 받았다는 자각을 가지고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죄를 용서 받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만약 죄 용서의 자각이 없이는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믿음을 가진 체 하는 나의 가식은 즉시 무너지고 말 것이다.

12. 피터 뵐러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이 문제와 관련해 성경과 경험을 참고해 보자는 데 동의했다. 나는 먼저 성경구절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럴듯한 설명을 제쳐놓고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만을 고려하되, 말씀과 말씀을 비교하고, 뜻이 모호한 구절은 뜻이 분명한 구절을 통해 풀기 위해 노력하자, 나는 그 구절들이 모두 내 주장을 반박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우리 경험은 그 성경구절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결코 일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산 증인들을 발견하기 전에는 당신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라는 마지막 주장을 하는 데까지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언제라도 그런 증인들을 보여 줄 수 있다고 답했다. 내가 원한다면 다음날이라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말한 대로 이튿날 세 사람과 함께 왔는데, 그들 모두는 각기 개인적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은 과거의 모든 죄가 용서 받았다는 자각 및 현재의 모든 죄에서 자유를 얻는 것과 분리 될 수 없음을 간증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믿음은 선물, 즉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하나님은 열심히 끈질기게 구하는 모든 영혼에게 반드시 이 믿음을 주실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이제 완전히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 믿음의 선물을 구하되 끝까지 구하기로 결심했다. 첫째, 나는 자각하지 못하면서도 청소년 시절 이후 계속 나 자신의 행위와 의에 기대어 구원의 희망을 가져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부분적으로든 전체로든 나 자신의 행위와 의에 대한 의존을 완전히 부인할 것이다. 둘째, 모든 은혜의 방편을 끊임없이 활용하되, 특히 의롭게 하고 구원하는 믿음, 나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 그를 나의 그리스도, 나의 의와 성화와 구속이 되시는 분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주시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할 것이다.

13. 5월 24일 수요일이 되기까지 나는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하고 둔감하며 냉담한 상태가 찾아오고, 보통 때와는 달리 더 자주 죄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법으로 계속해서 믿음을 간구했다. 내 생각으로 새벽 5시쯤 성경을 펴서 이 말씀을 읽었다: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느니라"(벧후 1:4). 외출할 때 다시 성경을 폈을 때 읽은 구절은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막 12:34)라는 말씀이었다. 오후에 성 바울 교회에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곳에서 부른 찬송가는 다음과 같다: "오 주여 내가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주여 내 목소리를 들으시옵소서.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옵소서. 주여, 만일 주께서 모든 불의를 주시하시면 누가 감히 주 앞에 서리이까. 주께 자비가 있으매 사람이 주를 경외하나이다. 오 이스라엘아, 주님을 신뢰하라. 주께서는 자비로우시며 그에게는 풍성한 구속이 있도다. 그가 모든 죄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리라."

14.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가(Aldersgate Street)에 있는 신도회 모임에 참여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경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신자의 마음에 일으시키는 변화에 관해 읽고있는 동안,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나 자신이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신뢰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심지어 나 같은 사람의 죄까지도 가져가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15. 나는 특히 악의적으로 나를 이용했거나 박해한 사람을 위해 온 힘을 다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후 나는 내 마음 속에서 생전 처음 느낀 것을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간증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원수가 넌지시 말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너에게 기쁨이 어디에 있느냐?” 그 전에 나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Captain)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에는 마음의 평안과 죄에 대한 승리가 반드시 따른다고 배웠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참된 믿음이 시작될 때 보통 동반되곤 하는 황홀한 기쁨, 특히 그 전에 깊이 애통하던 사람일수록 더 크게 느끼는 그 기쁨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때로는 주시지만 때로는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16. 집에 돌아온 후에 여러 가지 유혹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큰 소리로 외치니 그 모든 유혹이 사라졌다. 유혹은 계속해서 다시 찾아오고 또다시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고, 그는 “그의 성소에서 나를 도우셨다.” 나는 바로 이점에서 나의 과거의 신앙과 지금의 신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과거에 나는 은혜 아래 속해있을 뿐 아니라 율법 아래에도 속해 있어 내 온 힘을 다해 분투하고 싸웠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가끔 승리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항상 승리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