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1

『인간의 본질과 운명』

  

장기영 박사

 

 책을 들면서

이번 북 콘서트의 서평 과제로 주어진 이신건 교수의 책의 제목이 “인간의 본질과 운명”이라는 것을 듣고서 당장 떠오른 것은, 비슷한 이름의 책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의 본성과 운명”이었다. 보통 때 외양에서 풍겨지는 느낌은 소탈하시지만, 대화를 시작해보면 대인관계와 학문의 영역에서 꾸밈이 없고 당당하신 모습을 대하여 보았기에, 혹 책의 제목을 이렇게 정하신 이유가 라인홀드 니버를 불러서 무릎을 꿇려놓고 “내가 한 수 가르쳐주겠다!” 포효를 하시려는 것이 아닌지, 흥미와 궁금증을 가지고 책을 펼쳐 들었다.        

먼저, 책의 목차가 인상적이었다. 제 1-2 장인 “인간론의 의의”와 “신학과 인간학”은 책의 서론 격이겠구나 추측이 되었다. 다음으로, 신학적 인간학을 소개하기 위한 준비로서 “현대인의 인간이해”(3장)와 “동양적 인간이해”(4장)를 다룬 후에, 책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적 인간이해”(5장)를 다루고, 다시 마지막에 “전인”(6장)이라는 장을 추가한 순서를 볼 때, 교수님의 의도는 단순히 기독교적 인간론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은 인간 이해를 소개하고 이를 기독교적인 인간론과 통합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았다. 부록에 추가한, 신학과 일반학문을 포괄하는 다양한 서적들의 소개는 그러한 인상을 강화시켰다.

 제1 장 인간론의 의의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우선 저자는 “만약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님과 우주와 생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는 공감이 가는 질문을 던진다. 동시에,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중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생존에 쫓겨 이 주제에 무관심하거나 이 주제를 어렵게 생각하여 아예 다룰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현실을 언급하는 대목은 독자들로부터 ‘나도 그런데...” 하는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는 바쁜 시간만 있지 않고 조용한 시간도 찾아오고, 성공적인 시간만 있지 않고 병들고 고독하고 고통스런 시간도 찾아오기에, 독자들도 언젠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갈구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말로써, 인간이라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 고민하기를 계속 미루지만 말고 이 책을 통해 보석 같은 진리들을 깨내어 보라고 설득력 있게 독자들을 유혹한다.

제2 장 신학과 인간학

제2장에서 저자는 신학적 인간학의 바람직한 방법론을 언급한다. 신학이 인간론을 다루는 데 있어 피해야 할 양극단은 지나치게 신중심적으로만 보는 것과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으로 보는 것 모두이다. 인간중심적 사고에 치우쳐 성경의 계시의 유일성을 가볍게 여길 때의 오류의 예로서, 자유주의신학자들이 계시를 “경건한 자기이해(슐라이어마허), 절대정신의 자기활동(헤겔), 문화(리츨), 일반종교사(트뢸치), 양심(홀, 히르쉬) 혹은 일정하게 해석된 현존재(불트만)” 등으로 격하시킨 것을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성에 반하여,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중세 교회의 인간중심적 종교를 신중심적 종교로 되돌린 것처럼, 현대에는 십계명의 제 1 계명이 “신학적 공리”임을 확립한 칼 바르트의 주장이 신학의 신중심성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신학의 선포의 대상과 전도의 대상이 인간이라는 점, 또 역으로 인간학에서 다루는 “인간의 현상들(생물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사회학 등)”을 해석하고 적합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신학이라는 점에서, 저자는 신학과 인간학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하나의 짝으로 연결시켜 다루는 것이 바른 신학적 인간학의 방법론임을 지적한다.

 제3 장 현대인의 인간이해

제 3-4 장에서 저자는 인간 이해의 지평을 넓이기 위한 시도이자 신학적 인간학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로서 동서양을 통틀어 고대와 현대의 사상가들이 이해한 인간의 본질을 다룬다. 먼저, 제 3 장에서 저자는, 현대인의 자기이해를 “이성적 인간”, “충동적 인간”, “진화론적 인간이해”, “과정철학적 인간이해”, “철학적 인간학”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먼저 “이성적 인간”으로서 인간의 자기이해에 대하여, 인간의 사고와 세계 질서의 원리로서 누우스(Nous) 개념을 가르친 아낙스고라스, 이데아를 추구하는 영적 인간을 가르친 플라톤, 고차원적 정신을 가진 인간을 가르친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및 모든 것을 회의하되 사유하는 정신은 부인할 수 없었던 데카르트, 인간 속에 작용하는 도덕적 메카니즘의 원리를 밝히려 한 칸트, 역사를 인간 속에서 절대정신이 발현되는 변증법적 과정으로 설명한 헤겔 등 근대철학자들을 인간을 “이성적 인간”으로 제시한 이들로 설명한다.

“충동적 존재”로서 인간의 자기이해에 대하여, 저자는 역사를 생존을 위한 계급투쟁으로 본 마르크스, 인간을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본 쇼펜하우어, 생식을 위한 성적 본능이 의식과 무의식을 통해 인간을 지배함을 주장한 프로이드, 인간 삶과 역사를 권력 의지로 보면서 신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초인 되어야 함을 주장한 니체 등을 “충동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가르친 철학자들로 언급한다.

인간의 “진화론적” 자기이해에 대하여, 저자는 진화론을 인정하면서 인간 진화의 완성을 그리스도로 설명한 샤르뎅의 진화론은 “계속적인 창조” 개념을 통하여 진화론적 창조론으로 수렴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그리고 “과정철학적 인간이해”에 대하여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및 거기로부터 영향 받은 과정신학의 인간이해를 소개한다. 그 외에도 “철학적 인간학”에 대해, 인격을 통한 자기의식과 대상화의 능력을 인간의 특징으로 본 막스 셀러, 자신 밖에서 자신을 반성하는 탈중심성에 의한 인간의 개별성 자각이 일으키는 공허감을 종교의 근원으로 본 헬무트 플레쓰너, 인간을 “결함을 지닌 존재”로 보아 그 결함 극복을 위해 언어와 문화와 종교를 창조한 것으로 본 아놀드 겔렌, 정신적 존재로서 예견 능력, 목적활동의 능력, 자유로운 결단의 능력, 가치 파악의 능력을 인간의 특징으로 설명한 니콜라이 하르트만 등의 인간이해를 소개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저자는 이성적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자기이해에 대해 제한을 가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념은 역사를 계속적인 진보로 바라보는 희망적 견해를 낳았지만, 야만적인 전쟁과 생태계 파괴, 인간 삶의 경제적 문화적 격차 심화를 가져온 근대 역사는 이러한 낙관론을 파괴하고 이성의 한계와 심각한 모순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성의 위대성과 야만성 모두를 제시함으로써 저자는 이성이 인간의 윤리성을 담보하지 않으며, 이성 자체에 의해 이성이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 및 이성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충동적 존재로서 인간의 자기이해에 관하여는, 저자는 물질과 성적 본능과 권력은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이지만 오남용을 피하여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선용해야 할 요소임을 강조한다. 인간의 진화론적 자기이해에 대해서도 저자는, 인간의 존재 목적이나, 도덕과 이성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화론의 한계임을 언급하면서, 진화론에 기초한 인간에 대한 무분별한 진보적 낙관주의 및 잔인한 생존투쟁 등에 대한 정당화 등을 경계한다. 저자는 진화론에 대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을 종합하여, 만물의 진화 개념이 만물의 완성으로서 구원개념에 의해 보완될 때, 기독교 신학 내에서 진화론의 적절한 위치를 찾을 수 있다는 제3의 대안을 제시한다. 과정철학에서 시간의 흐름을 따라 항상 변화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이해에 대하여, 저자는 이 철학을 바탕으로 과정신학이 절대불변하는 전능자로서의 신관을 수정하여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창조적이고 응답적이고 설득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및 거기에 상응하는 인간 즉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변화 가능성을 가진 인간관을 낳게 되었음을 긍정적으로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철학적 인간학”에 대해, 저자는 인간성을 지나치게 축소하거나 절대화하는 오류 및 기독교적 인격신에 대한 부정과 신비주의적 범신론과 창조신앙 부정의 오류(쉘러), 인간의 탈중심성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와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탈중심성의 상호관계를 모호하게 제시하여 종교적 논의를 회피하는 단점(플레쓰너), 종교를 단순히 생물학적 기원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겔렌), 인간을 개체성으로만 보는 한계(하르트만) 등을 언급하고 있다.

 제4장 동양적 인간이해

제4장에서 저자는 우리의 의식 구조와 삶을 직접적으로 형성해왔으나 서구 문명과 서구 신학의 수용 및 보편화로 인해 오히려 낯선 것으로 취급 받게 된 동양적 인간 이해를 붓다, 공자, 맹자, 노자를 중심으로 불교, 유교, 도교의 가르침을 다룬다.

붓다는 인간을 무지와 집착으로 인해 번뇌와 고통에 빠진 존재로 보되, 결정론적으로 인간을 설명하지 않고 인간 본성은 선도 악도 아닌 중도적인 것이며, 인간은 주체적 각성을 통한 해탈로 무상하고 윤회에 속박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라고 가르쳤다.

공자는 윤리와 도덕을 갖춘 통치자로서 군자를 이성적 인간으로 가르치면서 공손, 경건, 인과 예, 지혜와 용기, 충성과 신의 등 덕의 요건을 세부적으로 제시하였다. 그 제자 맹자는 스승과 유사하게 인의예지를 바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을 이상적 인간으로 제시하였다. 맹자는 성선설을 최초로 주창하면서 인간은 자신 속에 있는 선한 마음을 자각할 때 선한 삶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공자와 맹자는 우주 안에 감지되는 도덕적 힘으로서 하늘개념은 받아들였지만, 초월적 인격신은 믿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도덕적 가능성을 인간 자신 안에서 찾으려 하였다.

노자는 우주만물의 궁극적 원리를 뜻하는 도 개념을 통해 인간 생존의 근거인 자연을 순리대로 따르는 삶을 가르쳤다. 자연이 변하여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듯, 인간 삶에서도 좋은 것이 언젠가는 나쁜 것이 되고, 정상이 비정상이 되고, 강한 것이 약하게 될 것이므로, 작은 것, 약한 것, 낮은 것의 소중함을 알고 겸손 및 소유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중용을 가르쳤다.

저자는 불교, 유교, 도교의 인간이해에 대해서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짧은 평가를 덧붙인다. 붓다의 불교와 비교할 때 기독교는 인간 실존을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데서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불교는 창조주 하나님이나 절대적이고 영구 불변하는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반면, 기독교는 인정한다는 점을 차이로 제시하고, 공자와 맹자의 유교와의 차이에 대해서는 기독교는 성선설을 반대하여 성령의 능력을 떠난 인간의 부패와 무능을 가르친다는 점을 제시하고, 노자의 도교에 대해서도 도 개념이 인격적 하나님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자연적 원리의 개념이며, 붓다 공자 맹자 노자가 모두 인간의 지혜를 강조하는 데 비해, 기독교는 인간의 지혜를 높이면서도 동시에 타락한 인간의 지혜의 한계 및 인간의 지혜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가치와 정당성을 얻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제5장 기독교적 인간이해

동서고금의 인간이해를 다룬 후 저자는 본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기독교적 인간 이해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죄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질과 운명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

먼저, 저자는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인간 창조의 주제 속에서 다룬다. 저자는 성경 속 인간의 창조기사를 과학적 지식과 연결시키지 않고 이스라엘이 주변 종교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재해석하고 선포하는 “해석학적 과정”으로 연결시킨다. 흙으로써 창조, 창조자의 생기를 불어넣는 이야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설명하는 대목 등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등 주변 문화권의 창조설화의 뼈대를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성경의 창조기사의 독특성에 대하여, 주변국가들의 창조설화들에서 인간은 신을 위한 부역의 목적으로 창조된 것과 달리, 성경에서 인간 창조는 인류 자체의 축복이라는 목적에 의한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으며, 오직 왕만을 신의 형상으로 가르친 창조설화들과 달리, 성경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시하여 평등성을 바탕으로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혁명성을 가진 인간관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형상 해석의 다양성에 대하여, 저자는 인간 속의 로고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의지의 자유(테르툴리안), 이성(이레네우스, 아퀴나스), 영혼(오리게네스, 어거스틴, 칼빈) 등 인간의 내면적 자질로 보는 견해들과, 인간의 몸의 외형과 연결시키는 견해(궁켈, 침멀리, 쾰러, 슈탐),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격적 만남을 이룰 수 있는 능력(바르트, 브루너), 자연에 대한 통치(볼프, 그로스, 오버홀처) 등으로 보는 견해들을 소개한 후, 하나님 형상을 인간의 본질적 구성 요소로 보는 견해와 인간의 기능으로 보는 견해로 구분하거나,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내면적 특성에서 찾는 견해와 외형적 특성에서 찾는 견해로 구분하거나, 하나님 형상을 관계의 기능으로 보는 견해와 통치의 기능으로 보는 견해로 구분하는 경향을 언급한다.

하지만, 저자는 각각의 구분이 지난 약점을 언급하면서 저자 자신의 하나님 형상 이해를 제시한다. 우선 저자는 최초의 인간을 고정된 실체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보는 견해가 지닌,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이나 미화, 혹은 정반대로 지나친 비관과 부정적 태도의 가능성에 반대하여,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할 수 있다는 견해(테오필로, 이레네우스, 클레멘트)를 지지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루어가야 할 과제가 되며, 하나님의 약속이자 종말론적 희망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구성요소로 보느냐, 기능으로 보느냐로 구분하는 시각에 대하여 저자는, 하나님 형상에 대한 인간의 구조적 이해가 인간의 계발과 교육, 상부상조와 협력을 약화시킬 가능성 및 인간의 기능주의적 이해가 인간의 존엄성을 기능과 역할로 대체하여 약자들(어린이, 여성, 장애자, 미성숙자)을 무시하고 억압할 가능성 양자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전체성으로서 구조와 기능 모두를 포괄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구조적 측면에서는 인간이 다양한 관계 속에서 행해야 할 것을 행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은사와 재능이 총체적으로 부여된 상태라고 한다면, 인간의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어 작동하는 인간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내면과 외면으로 구분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저자는 각 사람에게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인간의 특정요소(지성, 영성, 육체 등)가 다른 요소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여기는 기준에 의해 타인을 억압하게 되는 경향에 반대하여, 인간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을 반영함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저자는 하나님 형상의 편파적 이해가 인간과 사회의 계급화 및 약자 억압의 근거가 되어 인간의 평등성과 전인성, 공동체성, 연대성 및 가능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하나님 형상을 종합적으로 설명한다.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 잠재적 존재, 종말론적 지향성을 가진 존재로서, 타자를 필요로 하고 역할과 책임성을 가지며, 새롭게 형성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 동료, 세계와 관계 맺음을 말한다. 먼저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서의 창조라는 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 형상의 일차적 본질이다. 대신 관계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기로 선택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은총의 계약을 수립하신 자, 인간은 은총을 받고 책임적으로 순종하는 자의 관계이다. 동료 인간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남과 여의 성적인 차이가 잘 나타내듯, 서로를 돕는 풍부한 사귐을 통해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진정한 인간성의 본질을 드러낸다. 또한 세계를 대하여 만물의 통치권을 행사하되, 하나님을 대리하여 하나님께 위임 받은 통치권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지배권을 행사하여 파괴자와 착취자가 아닌 돌봄의 수행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죄인으로서 인간

하나님 형상을 다룬 후 저자는 죄라는 주제를 다룬다. 창세기 1-2장의 창조기사 다음으로 3장이 급하게 인간의 타락을 기록한 의도를, 저자는 인간의 위대성과 함께 인간의 비극성을 깊이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본다. 하지만, 죄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가 문제시하는 것은,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들의 원죄 교리는 타락 이전의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초지상적 영광”을 덧입혀 묘사하면서도 타락 이후 인간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에 대해서이다. 이에 반하여 저자는 성경에서는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인간이며,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과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책임적으로 응답해야 할 존재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창9:6절이 타락 이후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동물처럼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금지한 예에서 알 수 있듯, 전통적 원죄론이 인간을 전적무능과 노예의지를 가진 수동적 꼭두각시로 묘사하는 것은 비록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친 것이라 하더라도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원죄를 유전죄로 설명할 때 인간은 불가피하게 죄의 결정론에 빠지게 되는 현상을 경계한다. 저자는 죄의 보편성을 유전으로 설명하기보다, 각 개인이 인류라는 전체성 안에서 인류와 함께 죄인이라는 설명, 즉 인류의 공동의지와 개인의 의지가 함께 작용하여 인간이 “의지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는 설명을 통해, 원죄론이 인격적 존재로서 인간 개인의 결단성과 책임성을 부인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경향에 반대한다. 원죄의 영향이 보편적이라 하더라도 그것 역시 인격적 결단 속에 있는 인간의 행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상응하여 저자는 성경의 타락기사에서 뱀을 사탄으로 보는 것을 “신화적 해석”으로 규정하고, 뱀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악과 유혹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창3:15절에 나오는 뱀과 인간의 투쟁에 관한 기사 역시 악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이 아니라, 피조 세계 속에 이미 존재하는 인간과 적대적인 존재로서의 악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 저자는 성경이 악의 세력을 인간 밖의 세력으로 대상화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저자는 성경적인 죄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성경본문을 통하여 불순종, 불신앙, 교만(권력의 교만, 지적 교만, 도덕적 교만, 정신적 종교적 교만 등), 정욕 등으로 설명한다.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중요한 세 가지 관계가 왜곡되고 변질되는 것인데,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즉 하나님께로의 의존 거부 및 독립 선언에 의한 교제의 단절(영적 죽음)이다. 인간은 물신숭배로서 하나님 예배를 대신하였다. 둘째로,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로서, 사랑의 왜곡이 인간 속에 불신과 수치, 억압과 굴복, 성적 범죄, 살인, 탐욕과 도둑질 등을 초래하였다. 셋째로,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로 생계를 위한 고달픈 노동, 염려, 고생스런 삶을 초래하였다.

 그리스도인으로 지양되는 인간

 타락한 인간과 원죄를 다룬 후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이자, 인간을 위한 존재, 그리고 만물을 위한 존재이심을 설명함으로써,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인간이 실현되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 속에 나타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통치하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기 때문에, 저자는 인간의 “원초적 본질”이자 “종말론적 운명”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의 갱신은, 인간의 자기 수용이나 깨달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써만” 가능함을 확언한다.

 제6장 전인

동서고금의 현자들의 인간이해와 기독교적 인간이해를 각각 제시한 후, 저자는 철학사에 나타난 다양한 인간 이해를, 영혼의 불멸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이론(플라톤), 영혼과 몸의 분리와 결합을 강조하는 이론(데카르트), 몸의 실체만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이론(포이어바흐), 정신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이론(버클리), 정신과의 긴장 가운데 있는 몸과 영혼의 통일성(아리스토텔레스) 등으로 구분한 후, 인간을 부분적으로 이해한 철학자들의 견해와 달리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은 전인임을 강조한다. 루아흐, 네페쉬, 바사르, 레아브 등 인간을 설명하는 여러 용어를 설명하면서, 성경은 인간을 이분법(영혼과 육체), 삼분법(영, 혼, 육체)으로 나누지 않고 신체적, 심리적, 인식적, 기능적 측면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통일체로 이해한다는 말로서 그의 저술을 마무리한다.

 책을 덮은 후

이상에서 이신건 교수의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 요약을 마치고, 이 책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과 느낌에 대한 평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이 책 한 권을 읽고 마음에 느껴지는 뿌듯함과 배부름은, 마치 최고급 뷔페에서 갖가지 맛있는 요리를 배불리 먹은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실 처음 책의 목차를 본 후 ‘한 책에 이렇게 많은 내용을 다룬다면,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보다는 잡화점 식의 주장들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맛보고 끝나는 독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면서 우려는 저자의 박식함에 대한 감탄과 지적인 솔직함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본서를 쓰기 위해 기울였을 노력의 정도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바뀌고 말았다. 책은 별로 두껍지 않은 분량 속에 참 많은 정보와 주장을 압축하였지만, 어느 한 부분 내용이 부실하거나, 저자의 논지가 없이 정보를 짜집기 했거나, 내용의 전개에서 긴장과 균형을 상실함 없이, 동서고금의 가장 깊이 있는 현자들과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신학자들 및 성경의 인간 이해를 알차고 균형 있게 소개하고 있었다.

저자가 책의 내용에 기독교적 인간 이해 뿐만 아니라 타종교와 철학의 다양한 인간관을 포함시킨 것에 대하여 서평자가 높게 평가하는 점은, 이러한 연구는 기독교인이냐 아니냐의 구분을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적 자기이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는 점 때문이다. 제시된 내용들을 통해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잠시 스치는 생각의 단편들이 아니라 각각 학문적 체계를 이루는 깊이 있는 내용들을 접하면서 독자들은 스스로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깊이와 넓이로 인간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본서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없는 인간의 자기이해는 언제나 모호하거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 아래, 인간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에 대해 기독교적 입장에서의 짧은 평가를 덧붙인다는 점 역시 기독교적 인간학의 개론서로서 책의 가치를 더해준다고 생각한다. 만약 서로 상충되는 다양한 관점들이 적절한 신학적, 성경적 가이드 라인이 없이 무분별하게 제시된다면,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은 잘못된 인간관으로부터 잘못된 운명을 초래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책을 읽는 내내 각각의 인간관이 진리의 일면을 담고 있다는 긍정적 발견과 함께, 그 진리들이 오류가 없는 온전한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적 계시의 빛 아래 교정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예언자적 선포를 끊임없이 듣게 될 것이다. 본문의 중간중간에 나오는 기독교 신학과의 비교 및 오류에 대한 언급은, 저자가 종합적으로 제시할 기독교적 인간이해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심화시키는 문학적 장치도 된다는 점에서, 책의 구성 역시 매우 훌륭하다.

 다음으로, 서평자가 본서의 핵심인 기독교적 인간이해를 다루는 저자의 방법에 관하여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본서가 고리타분하고 사변적이고 추상적이기보다 현대적이고 현실개혁적이고 아주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먼저, 저자는 성경 저자들과 초대교회 교부들, 중세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적인 성경해석방법론에 매이지 않고, 현대의 비평적 성경연구 방법론 및 진화론적 창조론 등 진보적 복음주의의 신학방법론에 기초한 성경해석 및 신학적 입장을 수용하는 데 있어 급진적이고 대담하며, 또한 신학자료의 범위에 있어서도 근대 이후 신학발전의 결과들을 널리 활용한다는 점에서 현대적이다. 창세기 창조기사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또한 창조과학자들의 최근의 업적에 놀라워하는 보수적 복음주의자인 서평자의 입장에서 볼 때, 창세기 창조기사 속의 뱀을 사탄이라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악의 형상화로 해석하거나, 진화론적 창조론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저자의 진보적 복음주의의 입장은, 일면 성경적 계시의 다른 부분과 상충되거나 성경의 계시를 일부라도 부인할 위험성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거부하였던 합리적 신학방법론을 통해 성경에 관한 진리 및 성경본문의 보다 정확한 해석의 근거를 발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성경해석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보류의 태도를 취하면서도, 저자의 학문적 개방성과 수용성, 도전적인 학문의 태도에 큰 도전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서평자가 저자의 인간이해를 현실개혁적으로 보는 이유는, 저자는 하나님의 형상의 편파적 이해가 인간에 대한 속박과 억압, 불평등 및 인간성 왜곡을 초래할 가능성에 반대하여, 하나님 형상을 인간의 어떤 소유나 자질, 기능, 고정된 실체로 설명하기보다, 종합적 이해를 통해 하나님과 동료인간과 세계에 대한 바른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전인성과 평등성, 공동체성,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변화 가능성 및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의 책임성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인간이해가 현실개혁적이라고 보는 또 다른 이유는, 저자는 어거스틴의 원죄론 및 인간의지의 노예성 주장을 바탕으로 루터, 칼빈 등이 형성한 개신교 신학이 인간 본성에 대하여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타락 이후에 있어서도 인간의 책임성을 일관되게 강조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류의 죄의 보편성이 원죄의 유전 때문이라는 전통적 해석으로 인해 인간의 죄와 타락을 결정론적이고 필연적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하여, 인류의 공동체적 성격과 집단 인격 개념을 통해 인간타락의 보편성 역시 인간의 의지적 수용에 의한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종교개혁적인 부정적 인간이해와 죄의 결정론을 극복하고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의 인격성과 책임성을 회복하였다.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인간의 상태를 더 부정적으로 묘사하면 묘사할 수록 은혜가 빛을 발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묘사가 과연 성경적 묘사와 일치하는지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 점에서 서평자는 저자가 전통적 원죄론에 대하여 당당하게 이의를 제기한 것이 신선하고 놀랍게 여겨진다.

 웨슬리 신학자로서 서평자는 저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적으로 이해한 점과, 관계적 존재의 당연한 전제로서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본 점, 더 나아가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상태가 종교개혁자들이 묘사한 만큼 무능한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책임성을 지닌 존재로 묘사하는 점 등에서, 저자가 성결교회 신학자 존 웨슬리와 유사한, 탁월한 성경적 관점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비록 저자 자신이 타락한 인간을 묘사하는 데 있어 종교개혁자들과 존 웨슬리의 차이를 구별하는 데 실패하여, 인간을 성경보다 무능한 상태로 묘사하는 신학자들의 대열 속에 웨슬리를 포함시켰다 하더라도 말이다. 서평자는 지난 5월 17일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회와 웨슬리학회가 공동으로 가진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자유의지와 노예의지, 그 분기점으로서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이라는 논문을 통하여 저자와 유사한 관점에 서 있는 웨슬리의 인간관을 제시한 적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비록 세세한 관점과 해석에 있어서는 모두가 동의하기는 쉽지 않은, 저자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성경해석이 본서의 곳곳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본서를 전반적으로 평가하면 지금까지 출판된 어떤 서적들에서 제시된 것보다 저자의 “인간의 본질과 운명”이라는 명저에서 제시된 “기독교적 인간이해”가 우리 교단신학인 웨슬리 신학과 가장 맞닿아있는 인간론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본서는 인간론에 대하여 비록 많은 내용의 정보를 담고 있지만, 세상과 동떨어진 이야기,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비록 학문적으로 높은 퀄러티의 책을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서를 읽는 독자들은 바로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듯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된 흥미롭고 신기한 느낌으로 독서를 한 후 독자들은 나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그려보게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본서의 독서를 많은 분들께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