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2

『종말론의 역사와 주제』

오성욱 박사


I. 이신건 교수님‘과' 종말론

필자는 세계의 종말을 묵상하고 신학화(神學化) 하기에는 여전히 젊고 패기 있는 나이이다. 하여, 지금까지 필자의 신학적 관심과 연구는 주로 화사하고 근사한 조직신학적 주제에로 집중되어 왔다. 그런데 이신건 교수님의 "북 콘서트"를 당신의 제자 박사님들과 함께 기획하면서, 필자가 제출해야 하는 독서 보고서가, 종말에 대해 깊고 치열한 신학적 성찰이 담겨져 있는 이신건 교수님의 노작(勞作),『종말론의 역사와 주제』로 정해졌다. 몇 날 밤을 뜬 눈으로 세우다시피 하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독서와 묵상을 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려는 감사로, 걱정은 환희로, 그리고 종말에 대한 공포는 종말에 대한 희망으로 바뀌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동시에, 왜 이신건 교수님께서 종말론에 경도(傾倒)되실 수밖에 없는지를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었다.

첫째로, 바르트 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들에게는 하나의 '로망'이 있다. 바르트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의『교회교의학』은 종말론을 다루지 못한 채로 종결되었다. 바르트 학자들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바르트가 자신의 『교회교의학』에서 못다 이룬 안타가운 꿈과도 같은 부분이라서, 자못 애절한 느낌마저 들곤 하는 교리(敎理)이다. 하여, 바르트 학자라면 누구나, 바르트의『교회교의학』이 멈춘 그 지점에서, 바르트를 대신하여 바르트의 꿈을 이루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의식이 암암리에 내면화 되어있다. 한국 신학계를 대표하는 바르트 1세대 신학자로서, 이신건 교수님께서 종말론에 깊게 경도(傾倒)될 수밖에 없는 신학적 운명이라고 사료된다. 바르트를 일생의 연구 주제로 택하는 그 지점에서부터, 종말론에 대한 로망과 책임의식은 이미 자라나고 있었으리라.

둘째로, 성결교단을 대표하는 조직신학자로서 종말론에 대한 진지한 규탐(規探)은 일종의 당연한 책무이다. 웨슬리안 사중복음이라는 분명한 신학 노선을 견지해 오면서 견실하게 성장해온 복음주의 교단이 성결교단이다. 특별히, 중생, 성결, 신유, 재림으로 명토 박고 있는 사중복음 중에서, 재림으로 대별되는 종말론에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성결교단의 신학자로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요 의무라고 생각된다. 이신건 교수님께서는 성결교단의 조직신학자로의 의무와 책임을 방기(放棄)하지 않으시고, 적극적인 학습, 문헌 검증, 그리고 신학적 검토 작업을 거쳐서, 성결신학 속에 도도히 흐르는 종말론의 신학적 성격을 분명히 밝히시고, 그 장점과 단점을 개괄 하신 후, 단점 보완을 위해 온건한 독일신학이 제출한 바 있는 종말론과 적극적인 대화를 개진하셨다. 이신건 교수님은 성결신학이 표방하는 종말론을 전천년설에 입각한 임박한 종말의식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담긴 재림신앙이라 요약했다. 그러나 이신건 교수님은 이러한 전통적인 성결교단의 재림신앙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라는 또 다른 맥락에서 보여 지는 역사와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이 전제된 종말과 재림 사상으로 성결교단의 재림 사상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은 어떨지 조심스레 응수타진(應酬打診)을 하고 계신다. 즉, 세상에 대한 신유(healing)와 세상에 대한 심판(Judgement)이라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하나로 수렴되는 주님의 재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맥락에서 드러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와 긍정,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사유에서 드러나는 세상에 대한 철저한 심판과 소거(掃去)라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을 동시에 수렴하는 것으로써의 종말론을 후학들에게 연구과제로 남겨 놓으셨다.

셋째, '이신건'이라는 인간 실존이 경험해온 희망과 암운이 교차한 생(生) 속에서 돌출했던 풀리지 않은 미어(謎語)가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는 지점이 종말론적 지평이었기 때문에, 종말론이라는 조직신학의 주제는, 이신건 교수님에게 있어서 그 어떤 신학 주제보다 가슴을 뛰게 했던 실존적 주제였음을 어렵지 않게 추단(推斷)할 수 있다. 신학박사 학위 앞에 튀빙엔(Universität Tübingen)과 몰트만 박사(Jürgen Moltmann)라는 특권적 수식어를 장착한, 성결교단에서 첫 번째로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젊은 신학자의 앞길에 암운이 드리워져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신건 교수님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안온한 교수 연구실이 아니라, 이곳저곳의 강사 사무실이었다. 부푼 꿈을 앉고 돌아온 고국은 이신건 교수님에게 어느덧 어둡고 춥고 서러운 형극의 공간이 되었다. 매일 매일의 삶은 종말론적 삶이었고, 신학함은 사유의 유희가 아니라 삶과의 진지한 대화요 투쟁이기 까지 했다. 그러나 이신건 교수님께서 품고 계신 종말론적 자의식은 결코 비관적이거나, 원망적이거나, 절망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신건 교수님은 종말론적 자의식을 통해 주어진 현실을 은총으로, 사랑으로, 그리고 소망으로 전망한다. 이 모든 것들의 총화(總和)가 오늘의『종말론의 역사와 주제』에 그대로 녹아 있다. 

요약하자면, 칼 바르트 신학자인 이신건 교수님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일종의 신학적 '로망'이며 부채의식이고, 성결교단의 조직신학자로서 종말론은 일종의 책무이며 과제이고, 한 인간 실존으로서 종말론은 하루하루의 고단함과 불투명한 미래를 넉넉히 이겨낼 수 있었던 희망과 은총의 노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말론은 이신건 교수님의 신학 순례에 있어서 중요한 거점(據點)이 되며, 그의 신학 전반을 조망할 수 있는 망루(望樓)가 되고, 그의 신학의 숨은 저변을 관망할 수 있는 투명한 창문이다.

II. 이신건 교수님에 '의한' 종말론 리포트

A. 종말론의 역사

이신건 교수님은 프리젠이 구별한 이스라엘의 종말사상을 수용하면서, 구약의 종말론을 가름하는 골조(骨組)로 삼고 있다. 프리젠은 구약의 종말론을 전-종말적 단계, 원-종말적 단계, 활성화하는 종말론적 단계, 그리고 초월하는 종말론적 단계로 구약의 종말론을 대별한다. 즉, 초기왕조시대, 7세기 후반과 8세기 초엽의 예언자들, 포로기 전후, 그리고 묵시문학을 통해 그 특징을 드러낸, 구약성서의 종말론적 특징은 "차안적 희망," "미래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으로 이해," "개인의 구원보다는 인간의 사회를 강조," 그리고 "포괄적인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50-51).

신약성서의 종말론은 구약성서의 종말론과는 다른 양상으로 발전한다. 신약성서의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 바울, 그리고 요한의 견해를 고찰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라는 예수의 선포"(53)에서 그 특징이 분명해 진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실제적으로 현재하고 있다. 예수의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경험된다"(55).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미래적 실체로서 희망의 대상이다"(56).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예상할 수도 없고 계산할 수도 없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수혜자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단순한 백성, 국가, 신앙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가난한' 백성으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경제적 차원(실제적 가난)과 신학적 차원(야훼 신뢰)" 모두를 포괄한다. 물론, 소수 종교 엘리트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는 열려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분명히 회개가 요구되었다"(6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말을 매우 임박하게 고대하고 있었다. 바울은 종말을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곧 모든 원수들의 멸망을 초래하며, 둘째로 그리스도의 재림 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 살아 있는 성도들이 저들과 함께 구름위로 올라가서 항상 주님과 함께 사귐으로 들어간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세상 권세는 멸망하며,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영원한 사귐을 누린다고 천명한다(63). 바울의 종말론의 특색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 바울이 말하는 종말은 "단지 미래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은사를 통해 약속된 종말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보증금을 받았다"(64).

요한의 종말론은 또 다른 의미의 색깔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삶이 종말의 때에 완성될 것을 믿고 있지만, 우주적 혼란과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즉, 바울에게 있었던 장래의 우주적 사건으로서의 종말을 포기했다. 대신에, "요한에게서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은 이미 현재적" 사건이다(65).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의 파송은 이미 그 자체로서 예수의 재림이다"(66).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성도의 믿음이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자요,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 가운데서 살아있는 자다"(66).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먼 미래의 종말 때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성도의 삶속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비폭력 평화적 저항을 통해서 구현하도록 독력하고 하고 있다.

 속사도 교부와 호교론자,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안, 그리고 오리게네스로 대변되는 고대의 종말론의 특징은, 종말론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평가절하 되었고, 내재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강조됨으로써 종말론적 기대는 반감되었다는 점이다. 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영혼의 행복한 상태이며, 그리스도의 나라는 지혜와 의로움의 충만"(74) 함일 뿐이다. 중세의 종말론은 현재화된 특성을 보인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천년왕국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 천년왕국은 교회시대 전체를 포함한다. 성도들은 이미 왕노릇하고 있다"(76). 이에 반하여, 피오레는 어거스틴의 두 도성 이론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이론으로 간주하고, "역사 내재적인 진보의 역동성과 갱신된 교회와 사회"를 고대했다. 이제 곧 성령의 시대, 제3의 시대가 촉박하게 도래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78-79).

종교개혁자들의 종말론 중에서, 루터는 요한계시록 20장을 교회사적으로 해석했다. 즉 천년왕국은 이미 과거에 시작되었다. 그런데 천년왕국의 끝은, 교황이 적그리스도로서 본모습을 드러낼 때라고 생각했다. 루터가 생각한 종말은 개인과 역사와 자연까지도 변화시키고 완성시키는 계기가 된다. 또 한명의 종교개혁자 칼뱅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최종적 부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재림의 소망은 본질적으로 부활의 소망이다"(84). 그리고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최종적으로 수립되었고 완결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천년왕국설을 광신주의자를 양산하는 신학이론으로 폄하하고, 하나님의 나라로서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칼뱅에게 있어서 종말은, "이 세상 너머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성장의 완숙한 열매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것을 인도하고 성취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이 과정이 완성될 때를 안다"(86-87).

웨슬레는 종말론에 관한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웨슬리의 언술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만 누릴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 영위할 미래의 행복한 상태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누릴 수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영혼(마음) 속에서도 경험될 수 있다"(8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최종구원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을 웨슬레는 간절히 고대했다. 초기 성결교회의 종말론은 사중복음의 표제에서도 보여 지듯, 중요한 신학적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초기 성결교회의 종말론은 전천년설에 입각한 "임박한 종말의식과 재림신앙"(92)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역사과정의 비관적 파악"(95)과 "문명비판"(96)도 두드러진 특징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종말론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희망 가운데서 역사의 맥박에 적극적으로 호흡하고 반응하고 변혁하려는 의지를 소거(掃去)하는 초역사적인 신앙 흐름을 만들어 낸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초기 성결교회의 종말론은 "임박한 종말 기대를 통해 종말 앞에서 늘 깨어 있는 자세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거룩한 생활을 촉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직접 전도를 통해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교회를 독려했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교회의 타락을 방지하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큰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100).

19세기의 종말론은 인간중심적이고 현세 중심적 해석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칸트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표상을 윤리적 완전성을 향한 인간의 노력에 제한했다"(104). 헤겔은 "정신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104)을 역사로 규정했는데, "정신의 시간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발전을 보았다"(105).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나라를 두 가지 견지에서 이해했다. "하나는 성육신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나라의 자연화로 이해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107). 리츨은 성육신을 "하나님의 나라 실현의 시간적 시초"로 파악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점진적으로 발전"하며,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 내적인 현실이 되었지만, 항상 존재하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오직 점진적인 것으로 실현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먼 미래에 있다"고 주장했다(110).

현대의 종말론은 19세기 종말론을 어느 정도 교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바이스는 "본질적으로 내재적이고 윤리적 특징을 지니는 당대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에 맞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가 철저히 종말론적, 미래적, 초월적, 묵시적인 특징을 지닌다고 주장했다"(111). 슈바이처는 바이스의 견해를 더욱 근본적으로 밀고 나갔다. 즉, 슈바이처는 "예수의 생애 전체가 그의 종말론적 신념과의 관련성으로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12). 다드는 "바이스와 슈바이쳐가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를 철저히 미래적, 종말론적인 것으로 해석했다면, 다드는 철저히 현재적인 것으로 해석했다"(114).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에 입각하여 종말론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불트만에 따르면 매 순간은 종말론적이다. 매 순간은 하나의 종말론적 순간이 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서 이 가능성은 실현된다. 역사의 의미는 항상 현재에 있다"(116). 쿨만은 "철저한 종말론"과 "실존적 종말론"을 조정하려 했다(116). 쿨만은 "선적인 시간 개념"을 제출했다. 쿨만에 따르면, "시간의 전환은 미래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건, 곧 과거에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시간은 성취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금 이미'(schon)와 '아직 아님'(noch nicht)의 사이에 있다"(117). 바르트는, 시간의 전환이 종말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개입하는 창조적인 하나님의 행동"(118)에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기 바르트는 자신의 생각을 변경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세워진 지배, 그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다.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119)라고 주장했다. 틸리히는 주장하기를, "과거와 미래는 영원한 '현재'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종말은 자신의 미래적 차원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현재적인 체험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지금' 영원의 얼굴 안에 있다"(121)라고 주장했다. 판넨베르크는 "폰 라트(von Rad)의 구속사 개념을 확대하고, 묵시문학적 역사 이해에 근거한 보편사와 예수의 출현, 특히 부활의 종말론적, 선취적 성격과 헤겔의 계시 이해를 종합함으로써 보편사적 역사와 계시의 이해, 보편사적 종말론을 전개하였다"(122). 몰트만은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기했다. 몰트만은 제언하기를, "기독교의 종말론은 기독교의 희망론을 의미한다. 종말론은 올바른 신학의 마지막, 부록이 아니라, 그 시작이다. 기독교는 다만 부록으로서만 종말론이 아니라, 전적으로 완전히, 앞을 향한 희망, 전망 및 실천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또한 현재의 변혁과 갱신이다. 종말론적인 것은 기독교에 덧붙여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매체이며, 모든 소리가 집중되어 조율되는 원음이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기대되는 새날의 여명의 색깔이다"(123-124).

지금까지 이신건 교수님의 종말론 리포트를 사적(史的)으로 소략해 보았다. 이신건 교수님은 리포트를 마감하면서, 올바른 종말론적 준거(掃去) 틀을 다음과 같이 제출한다: (1) "불트만이나 초기 바르트 등에게서 볼 수 있듯이, 종말이 역사를 삼키거나 영원이 시간을 지양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종말론을 진정한 기독교적 종말론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126). (2) "바이스와 슈바이처 등에게서 볼 수 있듯이, 역사가 종말을 삼키지도 않는다. 다시 말하면, 무한히 지속되거나 영원히 순환하는 역사가 종말론을 무의미하게 만들거나 폐기해 버리지 않는다"(127). (3) "종말론은 실존적으로 관련된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종말은 인간에게 윤리적 충격을 주어 궁극적인 미래 앞에서 결단하게 만든다"(129). (4) "종말론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을 간과하는 역사해석은 비성서적이다. 몰트만의 말대로 종말론은 미래 일반에 관해 말하지 않고, 분명한 역사적 현실로부터 출발하며, 그 미래와 그 미래적 가능성, 그 미래의 힘을 알린다. 다시 말하면,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미래에 관해 말한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의 현실을 인식하고, 부활하신 분의 미래를 선포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는 미래에 관한 모든 진술의 근거로서 모든 종말론을 판단하는 시금석이 된다"(130).       


 B. 종말론의 주제        

1. 파루시아

 파루시아는 "우리에게 오는 것의 현재, 말하자면 도래하고 있는 미래"(132)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하게 돌진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던 예수의 믿음과 기대는, "예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초대 교회의 기대로 바뀌었다"(132).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대한 소망은 점점 희미해졌고, 그 영향 또한 약해 졌다.

파루시아 지연은 중간시대, 즉 교회의 시대로 대체되어 이해했다. 베드로는 파루시아의 지연을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136)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주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전 3:9)"(136)라는 새로운 시간 개념으로 파루시아 지연을 돌파하려고 했다. 또 다른 한편, 파루시아에 대한 임박한 기대를 초대교회의 계산 착오로 간주하여 파루시아 지연을 정당화 했다.

근・현대 신학에서, 종말론을 철저히 폐기하거나, 예수의 종말론적 설교를 순수한 윤리로 축소하려는 흐름이 일어났고, "예수의 어법을 예언자들의 어법과 동일시"(139) 한 후, 예수의 언술은 미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변화시키려는 의도라고 간주함으로써 재림지연의 문제를 해결하려했다. 이러한 종말론에 대한 왜곡 내지는 축소가 횡횡하는 흐름 속에서 로핑크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로핑크에 따르면, 다음의 세가지 사항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노력과 능력을 초월해 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속해 있는 차원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건이다. 둘째,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동시에 인간의 역사 안으로 파고 들어오며, 모든 역사를 끝장낸다. 셋째, 이러한 사건은 매우 가깝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긍극적 결단 안에 서 있다"(140).

특별히 로핑크는 파루시아를 인간의 죽음 속에서 맞이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파루시아는, "오직 죽음을 통과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출현하는 방식으로, 다시 말하면 죽음 속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142). 이러한 이해를 로핑크는 변증법적 신학자들이 제기한 "수직적 종말론"과 상통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즉, "죽은 자들의 부활과 보편적 종말은 기나긴 수평적 시간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죽음 속에서 수직적으로 일어난다"(142). 로핑크는 수직적 종말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죽음 속에서 개인의 종말만이 아니라 세계의 종말을 함께 보려고"(144) 했다. 이러한 로핑크의 종말이해를 이신건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비판적 결론을 맺는다: "우리는 로핑크가 역사적 종말론을 성급하게 개인적 종말론으로 축소하거나 종말의 역사적, 세계사적 지평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147).

이신건 교수님은 파루시아 지연의 문제에 대한 제(諸)학자들의 답변을 개괄한 후, 교수님 자신의 결론을 전개하신다. 출발은, 파루시아에 대한 바르트의 해명에서 시작한다. 바르트는 파루시아를 삼중적 형태로 구분한다. "첫 번째 파루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두번째 파루시아는 성령의 부으심이다." "세번째 파루시아는 시간과 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도래다"(148). 이러한 바르트의 삼중적 파루시아에 근거하여 이신건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결론 맺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이 파루시아의 형태라면, 파루시아는 분명히 단지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수의 파루시아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미 현재 안으로 돌입해 왔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과 승천은 더 영광스러운 파루시아, 곧 종말의 궁극적인 도래를 위한 새로운 약속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므로 원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에게 일어난 일이 자신들에게도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 했다"(149).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일어난 일들로 성도들은 충분히 희망과 소망 가운데 거할 수 있다. 동시에, 미래로 연기된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하나님의 약속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저들이 엮어가는 역사를 부단히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하나님은 궁극적인 존재로서 우리의 현재이심과 동시에 항상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며, 우리의 미래임과 동시에 항상 우리의 종말이기도 하다"(150).

 2. 죽은 자들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주제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 주제였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영생은 영혼 불멸, 곧 육체를 떠난 영혼의 존속"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부활"로부터 기적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에는 영생이라는 개념이 희망의 표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현재적 교제를 확신했기에 죽음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삶에 있어서 희망은 영생이 아니라, 후손의 번영에 있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이라는 현상을 불행한 것으로, 비통하고 힘겨운 인간사로,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우울하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에 맞서는 희망을 새롭게 제기하기 시작했다"(155). 그 희망은 불멸이나 부활이라는 관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궁극적인 결과"(155)로부터 연원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보편적 왕권에 대한 신앙은 영생의 희망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155). 희망의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야훼신앙"에 두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설명할 수 없는 고난과 불의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질문이 제기 되면서부터, 부활 신앙이 체계적이고 본격적으로 개진되기 시작했다. "그 심한 억압과 박해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함과 능력에 대한 믿음은 부활과 영생에 대한 희망을 낳았다"(162). 묵시 문학과 예수 시대의 유대교에서 부활 사상은 이미 친숙한 개념이 되었다.

공관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확신했다. 특히, 죽은 자들의 부활에 신앙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더욱 강력하게 힘을 얻게 되었다. "바울도 묵시문학적 표상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을 강력히 기대"했다(166). 바울이 생각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몸과 역사를 배제한 내면화된 신앙이 아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통치(나라)의 현재성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역사의 완성과 전인(全人)의 구원을 바라보았다"(167). 미래의 부활은 참인간이시고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보증된다. 그러므로 "생명과 죽음은 이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척도가 아니다. 유일한 척도는 예수 그리스도요, 그 분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스도는 죽고 살아나서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는 죽을 지라도, 그는 이미 죽음을 극복했다"(169). 

3. 공의로운 심판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여하며, 부활한 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으로 노정된다. 환언하면,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기 위해서 부활할 것이다"(171). 이점이 바로 통속적으로 생각하는 파루시아의 기다림과는 다른 각도의 이해를 요청한다. 즉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이 땅에서 패배하고 억눌린 자들이 보복과 전복의 꿈이 구현될 수 있는 계기도 아니며, 종교적 보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파루시아는 예수의 길의 완성이다. 파루시아는 '도상'(途上)의 그리스도'가 자신의 길의 목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길의 완성은 만물의 새로운 창조의 기초로서 하나님의 공의가 승리하는 것이다"(173).

구약성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도래함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궁극적으로 구현될 것을 예언했다. 동일한 맥락의 예언은 호세아서에도 발견된다. 하박국 선지자도 "궁극적으로 불의한 세력과 악한 자들에게 종말이 올 것이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178).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러 공의의 개념이 완전히 새롭게 정의 된다. 예수의 공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근거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계명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계시된,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근거한다"(179). "포도원의 비유"(마20:1-15)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새로운 공의의 표본이 된다. 즉, 먼저온 일꾼과 늦게 온 일꾼을 차별 없이 품삯을 주시는 것이 예수의 새로운 공의이다. "새로운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으로서 아무 차별이 없이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친다"(181). 그러므로 "예수가 선언하고 실천한 새로운 하나님의 공의는 조건적이고 보복적인 공의가 아니라 죄인을 의롭게 하고 공의를 창조하는 은혜로운 공의"이다(180).

예수에 의해 새롭게 조명된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된,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심판자라는 사실 자체가 믿는 자들을 희망 안에서 세우신다. 예수의 공의를 사랑과 희망으로 이해한다면, 최후의 심판의 개념도 사전적인 의미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예수로부터 최후의 심판을 해석해야 한다고 이신건 교수님은 주장한다: "만약 최후심판의 마지막 목적이 죄인들과 거룩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거대한 마지막 청산 작업이라면, 최후의 심판은 분명히 '마지막 일'이 될 것이다. 만약 최후심판이 하나님이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영원한 공의 위에 세우고 그리하여 영원한 평화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고, 모든 것과 모든 것 안에서 자신의 공의를 계시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한 것이라며,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아니라 '마지막 이전의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일'은 하나님의 나라와 모든 사물의 새 창조일 것이다. 죄가 첫째 일이 아니라 창조의 근원적 축복이 첫째 일이듯이, 무서운 심판이 마지막 일이 아니라 공의가 머물게 될 새 창조의 궁극적 축복이 마지막 일이 될 것이다"(183).

 4.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창조는 "심판과 파괴"를 통해서, 그리고 공의의 세계는 불의한 세계가 극복되고 가능한 사태이다. "문명의 진보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선한 행위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184). 새 하늘과 새 땅은 심판과 파괴를 전제한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잠정적인 것이고, 궁극적인 것은 새로운 창조"(185)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항상 새로운 일을 조성하시고 창조하셨다. 이러한 사상은 다음과 같은 세계 이해를 전제한다: "세계는 닫혀 있지 않고,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 세계는 영광의 나라, 곧 '새로운 창조'를 향해 질주한다. 성서는 이것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창조는 옛 창조의 회복이나 대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과 혁신을 의미한다. 만물이 새롭게 창조될 때, 시간적인 삶은 영원한 삶으로 변할 것 이고(인격적 종말), 역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변할 것이며(역사적 종말), 시간적인 창조는 영원한 창조로 변화될 것이다(우주적 종말)"(187).

 요한은 새로운 창조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유한한 피조물 안으로 하나님께서 오시는 환상을 보고한다. 하나님의 임재는 죽음을 통해 기인된, 파괴와 분열을 치료하고, 창조물로부터 "죽음, 흑암, 차가움과 혼돈"이 무력화되고, 결국 소거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새로운 창조의 실감나는 조감도를 "이 땅으로 내려오는 하늘의 예루살렘"의 모형을 통해 그려주고 있다. "새로운 예루살렘은 낙원이요, 거룩한 도시이며, 우주적 성전이다"(189).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그려주고 있는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 이것은 성전 파괴에 관한 예수의 말씀과 부합한다. 성전이 없다는 것은 성직자도 없고, 예배도 없고, 종교와 제사도 없고, 속됨과 거룩함의 분별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190). 하늘의 새 예루살렘은 오직 사랑만이 존재하고 역사하는 곳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신건 교수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역사가 시작될 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 역사가 끝날 때,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찬란한 영광은 이전의 모든 영광을 압도할 것이다. 그 한가운데는 죽임을 당하고 부활한 만왕의 왕, 곧 '어린 양'이 앉아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의 발 앞에 우리의 면류관을 벗어놓고, 경이와 사랑과 찬양을 끝없이 바칠 것이다"(191).

5. 개인의 종말

 영지주의에서 이해하는 인간은 철저히 영과 육을 분리하여 영은 최고의 가치를, 육은 쓸모없는 철저한 이원론에 입각해 있다. 그렇지만 고대교회는 "영혼만이 아니라 몸도 구원, 곧 부활에 참여하도록 결정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몸의 부활을 해석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보통 세 가지 갈래의 해석 방식이 존재한다. "하나는 죽음과 보편적인 부활 사이에 의인들과 순교자들이 머무는 중간상태를 믿는 유대교적, 묵시문학적 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서 숨겨져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머문다고 믿는 신약성서의 증언(살전 5:10; 롬 14:8)이며, 마지막은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영혼불멸을 믿는 플라톤 전통이다"(193).

플라톤의 영혼불멸설이나, 묵시문학의 중간상태 이론, 아퀴나스의 영혼은 몸의 형상이라는 이론은 이원론적 인간이해로 흘러감으로서, 몸의 부활이라는 성서의 희망을 저버리게 한다. 하여, 개신교 신학은 영혼불멸 이론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바르트는 인간의 전체적인 죽음을 주장하고, 죽은 자들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틸리히도 "부활은 옛 것의 죽음으로부터 일어났다"고 주장하며 영혼불멸의 개념을 거부한다. 특히 쿨만은 영혼불멸에 대한 신앙을 기독교의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서만 인간은 영생에 참여한다"고 주장했다(199). 물론, 쿨만은 영혼불멸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성서 속에서 "잠든 영혼의 중간 상태" 개념을 발견하여, 모순과 긴장을 유발시킬 수 있는 죽은 몸과 잠든 영혼의 종합적이고 중재적인 사고를 제안했다.

로핑크는, "죽음 속의 부활"이라는 보다 진일보한 이론을 제출했다. 구원과 창조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은 죽음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로 남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죽음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긍정은 결코 폐기 될 수 없다고 로핑크는 주장한다. 몰트만은 "죽음 속의 부활"이라는 표상의 문제점을 꿰뚫어 보았다. 즉, 이 세계는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며, 이는 이 땅과 인간의 신체적 연대가 부인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하여, 몰트만은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살고, 전적으로 죽고, 전적으로 부활한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종말론적 사건이다. 그런데 살리는 영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서 이미 이 삶 속에서 부활의 힘으로 경험된다. 생명의 영은 부활의 힘으로서 죽음보다 강하며,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멸할 삶의 전체는 이 영 안에서 이미 여기서 죽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영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이 삶을 여기서 죽는 것과 동시에 죽지 않는 것으로, 허무한 동시에 허무하지 않는 것으로, 시간적인 동시에 영원한 것으로 경험하게 한다"(204).

몰트만의 주장은, 플라톤의 영혼불멸도 아니고, 가톨릭 신학자 로핑크가 제안한 '죽음 속의 부활'도 아니다. 몰트만이 제안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아니 그리스도를 다시 살린 성령의 능력을 통한 '죽은 자들의 부활'의 희망이다. 그런데 부활의 영은 이미 여기서 그리스도인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죽음 속에서도 소멸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변형된다"는 사상이다(205).


III. 이신건 교수님'의' 종말론

종말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유토피아를 열열이 갈망하는 것인가? 아니면 디스토피아의 가공할 공포 속에 숨죽이고 있는 것인가? 종말 신앙의 의미는, 이 세계가 자율적으로 조절되고 운명지워진 거대한 시스템이 결코 아니고, 보이지 않는 영적 권세와 신들에 의해 통치되는 영역이 더더욱 아니며, 그렇다고 인간이 스스로 주인 됨을 주장하고 마음대로 다스려도 되는 세계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종말신앙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종말 신앙은, "세계는 종종 혼돈, 우둔, 사악, 기만, 불의, 피와 눈물로 얼룩져" 왔지만, "세계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220). 세계와 시간이 하나님의 통치와 은총 아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드러내 주는 것은 "예수 안에서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220)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애절한 향수나 미래의 이상향을 향한 열렬한 소망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철두철미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꿈,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열망, 이를 위한 한님의 확고한 약속과 신실한 행동에 근거한다"(221).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홀로 역사하심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참여와 협력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의 성도들과 함께 사역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누룩, 하나님 나라의 전위대가 되라는 부름"(222)을 받았다.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존재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는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과 대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즉, 교회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세상의 제(諸)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던져주신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교회는 말과 행동을 통해 세상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고, 온갖 저항 앞에서 복음을 증언할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224). 이러한 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을 향한 책임적 존재로 관계 맺는 방식이다. 


IV. 필자가 평가하는 이신건 교수님의 종말론: “하나님의 나라에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고  세상에 대해 책임적 존재로서 살아 갈 것을 촉구하는 희망의 노래“

종말은 현재적인가 혹은 미래적인가? 종말은 유토피아(Utopia)인가 혹은 디스토피아(Dystopia)인가? 종말은 처절한 심판인가 혹은 새로운 창조인가? 종말은 어둡고 음습한 절망인가 혹은 밝고 빛나는 희망인가? 종말은 수동적인 기다림인가 혹은 역동적인 참여인가? 종말은 역사적인 사건인가 혹은 초역사적인 환상인가? 종말론적 전망아래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 세계는 악으로 점철된 공간인가 혹은 조금이라도 선한 것이 남아있는 영토인가? 종말신앙이 믿고 있는 바는 영혼불멸인가 혹은 몸의 부활인가? 이신건 교수님의 저서는 이러한 다양하고 어려운 질문에 대해 소상하게 답변을 해 주고 있다.

종말은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역사와 초역사를 동시에 아우르면서, 예수로 발원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도의 적극적 참여와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간절한 자세가 요청된다. 특히, 영혼불멸의 관점이 아닌 몸의 부활을 예수의 파루시아와 연동해서 생각할 때, 이는 불의의 심판과 이 세상의 파멸이 수반되나, 이러한 심판과 파멸은 예수의 파루시아의 궁극적 본질이 아니라 '궁극 이전의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 구현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위한 정지작업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말은 우리에게 낭패와 공포로 다가 오는 것이 아니라, 심판과 파멸 뒤에 오는 공의와 새 창조를 고대하며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꿈으로 다가온다. 이 희망의 노래는 우선적으로 '기다림의 노래'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시고 계신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심으신 하나님 나라의 누룩인 교회의 지체가 되어, 세상에 대한 책임적 존재로 살아가면서 목놓아 불러야 하는 '사명의 노래'이기도 하다.

바르트 학자로서 이신건 교수님은, 바르트가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멈추어 섰던 지점에서 바르트를 대신해서 종말론을 완성했다. 한국 신학계에서 바르트 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응당의 책무를 완수하셨으며, 바르트 생애의 마지막 신학적 염원을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부터는, 바르트가 종말론을 집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거나, 아니면 바르트의 종말론이 애매모호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신건 교수님의 저서『종말론의 역사와 주제』를 살며시 전해 드리는 것으로 충분한 해명이 될 것이다.

성결교회를 대표하는 조직신학자로서 이신건 교수님은, 초기 성결교회를 관통하는 종말론을 전천년설의 기조 위에서 '임박한 종말의식'과 '재림신앙'으로 정의하고, 이러한 초기 성결교회의 종말론을 통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거룩한 생활, 늘 깨어서 준비하는 구별된 삶, 그리고 직접 전도를 통해 배양된 구령의 열정으로 가능했던 거룩한 교회와 성경적 교회부흥을 경험케 했다고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종말론의 또다른 측면인 역사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영토 확장을 위해, 교회의 역사적인 결단과 행동도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도 함께 고려하는 성결교단이 되어, 종말론적 지평을 보다 넓게 펼쳐 보이는 것은 어떨지를 진지하게 타진하심으로 성결교회의 재림론의 지평확대를 위해서 조직신학자로서의 신학적 소임을 다 하셨다.

개인적 신앙 실존의 차원에서 이신건 교수님은, 종말론적 신앙을 온몸으로 보여 주셨다. 교수님의 신학 순례의 길이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천둥 번개가 내려치는 빗속을 고독하게 홀로 걸어가야 할 때도 있었고, 따가운 햇볕을 막아줄 한그루의 나무도 없는 황량한 인생의 사막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었으며, 어떤 때는 지친 몸을 이끌고 가파른 언덕을 넘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신건 교수님은 신학 순례의 길을 멈춘 적도 없었고, 그 길을 원망한 적도 없다. 어떤 환경에서도 책을 펼쳤으며, 글을 썼고, 늘 제자들을 사랑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예수의 파루시아가 표면적으로는 파괴이고 두려움이고 어두움이지만, 그 내면은 공의의 실현이고 새 창조라는 종말의 파라독스를 이신건 교수님께서는 온전하게 직시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종말론적 자의식 속에서 이신건 교수님은, 폭풍우가 쏟아지는 길 끝에, 황량한 사막 너머에, 그리고 가파른 언덕 저 높은 곳에,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찬연히 빛나고 있음을 확신하고 걸어가심으로, 종말신앙이 저 춥고 어둡고 서러운 곳에서 등지고 홀로 앉아 애통해 하는 인간의 삶을 얼마나 아름답고, 소망스럽고, 사랑스러운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우리 모두에게 몸소 보여 주셨다.

그러고 보면, 이신건 교수님의 노작(勞作)『종말론의 역사와 주제』는 단순히 종말론에 관한 신학적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신학교재만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은 우리 모두가 종말론적 사태 속으로 뛰어들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연원된 부활과 희망의 빛 가운데서 신학의 순례를 계속하라는 노(老)스승님의 따뜻한 염원과 사랑이 담긴 위로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 모두는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신학 순례의 길에서 견디기 힘들고 암담한 현실을 만나도, 이신건 교수님께서 강의실에서 가르쳐 주시고, 몸소 삶으로 보여주신 종말론적인 희망의 신앙으로 돌파하여, 하나님께서 각자 모두에게 주신 사명완수에 매진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