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42)

 

비우느냐, 채우느냐, 이것이 문제다! 

(2018년 8월 11일)

 


내가 오직 교수직만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교수로서 공식 은퇴를 앞두니 가장 고민스러워지는 것이 있다. 이제는 나를 비워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비워야 하는가? 아무리 아쉽더라도, 내가 누리던 권리를 다 비워야 한다. 조금 서운하지만, 이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내가 쌓아놓던 책을 비우는 것은 조금 더 어렵다. 그렇지만 가난 속에서 어렵게 모은 귀한 책이라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집안에 쌓을 공간이 부족하고, 앞으로 읽을 가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정성껏 가꾸던 텃밭과 정원과 헤어지는 것이 솔직히 제일 어렵다. 그래서 곧 떠날 곳을 하루에도 수차례 쳐다보곤 한다. 말없는 꽃과 나무와 헤어지는 것이 왜 가장 힘들까? 내가 가장 정성을 쏟았고 그래서 가장 정들었기 때문이다. 난 도시에서 태어나 살았기 때문에 “고향이 그립다”는 느낌은 별반 들지 않았다. 그러나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난 사람들이 왜 고향을 그리워하고 명절마다 힘겹게 찾아가는지 이제야 공감이 된다. 자연은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돌아갈 곳이므로 영원히 헤어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내가 정든 자연을 떠나도, 새로운 자연을 되찾을 것이다.

김삼환 목사의 교회세습 판결의 후유증과 파급력이 만만치 않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가 지금껏 누리던 막강한 권력과 금권과 명예를 버리기가 결코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가 은퇴 후에 입게 될지도 모를 상처와 손해까지 진지하게 예상하고 고민했다면, 그로서는 세습이 더욱 더 필요하고 간절했을 것이다. 비록 세습이 필요선(必要善)은 아니어도, 필요악(必要惡)은 된다고 강하게 확신했을 법하다.

다른 수많은 목사들이 성공리에 세습하고 떳떳이 고개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 그로서는 세습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였다면, 어떤 행동을 했을지 솔직히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에게 돌멩이를 던질 자신과 자격이 내게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멩이를 던져라!”는 예수님의 손가락이 지금 나에게도 향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이 오래 쌓았던 것을 왜 쉽사리 버리기 어려운가?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여서 그런가? 오랫동안 익숙했던 것과 헤어지고 매우 생소한 것을 직면하기가 무척 힘들고, 그래서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인가?

이런저런 그럴듯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우리가 익히 들어온 설교 속에도 강력한 합리화 기제가 잠재해 있다고도 여겨진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온 설교는 대개 무한한 축복과 성장, 성공과 번성 등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복음과 구원’이라고 말해 왔다. 의인의 고난과 자발적 희생, 장엄한 순교 이야기는 들어보기 매우 어려웠다. 예수의 성육신, 그의 삶과 고난은 실제로 “비움과 나눔”으로 일관되어 있음에도 수많은 설교자들은 “채움과 누림”만을 일방적으로 설교해 오지 않았는가? ‘비움’은 오직 불교인의 몫이었고, 그리스도인은 오직 ‘채움’만을 목표로 달려오지 않았는가?

솔직히 지금까지 우리에게 비움의 설교와 비움의 훈련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니 타고난 이기적 존재인 인간이 피눈물이 나게 모으고 쌓은 것을 어찌 쉽사리 버리고 비우려고 하겠는가? 김삼환과 옹호 세력을 비판하기는 가장 쉽다. 비록 그의 세습이 좌절하더라도, 제2의 명성교회가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므로 비판과 욕설보다는 근본적인 대책이 더 시급하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설교와 신학 교육의 근본을 냉철히 되돌아보는 것이다. 교회 세습의 문제는 관행과 제도의 변화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더 근본적으로, 더 본질적으로 우리의 의식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 신학과 신앙 체계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세습 문제는 세상의 종말까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