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과 새 창조의 하나님”

 

        어저께 나는 박영식 박사가 쓴 글 한편을 유튜브에 올렸다.

        “고통 중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글이다.

        고통에 빠진 사람을 값싸게 위로하느니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하며,

        하나님과 예수님도 바로 그런 분이라고 한다.

        고통 중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도 좋겠지만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엔도 슈사코는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소리를 들었다지만,

        아우슈비츠에서 엘리 위젤은 하나님의 침묵에 치를 떨었단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 앞에서는 웅변보다는 침묵이 더 낫고,

        침묵도 때로는 하나의 우렁찬 웅변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 위젤에게도 말씀하셨단다.

        전기 철조망에서 새까맣게 타 죽은 나를 보지 못했느냐?

        가스실에서 함께 죽어간 나를 보지 못했느냐?

        죽을 수 있는 하나님도 과연 하나님인가?

        만약 하나님이 죽는다면, 세상은 어찌 되라는 말인가?

        보수꼴통 신자들은 오늘도 이렇게 어리석게 묻고 있지만

        죽음은 부활로 가는 길임을 전혀 알지 못하느냐?

        물론 아들의 죽음 속에서 아버지는 죽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죽는 것보다 더 괴롭고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

        죽지 못할 고통보다는 차라리 순간의 죽음이 더 낫지 않겠는가?

        오직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고난당하는 자를 도울 수 있다고

        오래 전에 옥중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본회퍼가 말했단다.

        나는 이를 다시 고쳐 이렇게 말하련다.

        오직 죽을 수 있는 하나님만이 죽는 인간을 도울 수 있다.

        우리가 죽지 않고는 부활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함께 고통과 죽음을 감수하심으로써

        고통과 죽음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신단다.

        그러므로 재난과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죽어가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결코 홀로 아프고 않고, 결코 홀로 죽지 않는다.

        그대들은 새 창조를 위한 고통을 미리 감수하는 위대한 산모들이요,

        산 자들보다 먼저 부활하기 위해 먼저 죽는 새 시대의 선구자들이다.

        그러므로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라!

        허망한 파멸의 죽음 속에서도 즐거이 노래하라!

        하나님께서 황홀한 잔치를 예비하고 계신다고 하지 않은가!

        (2020년 8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