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7)

한스 큉의 <유대교>

  (2015년 12월 13일)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 간의 대화를 목적으로 한스 큉이 저술한 종교에 관한 저작 가운데서 가장 먼저 나왔지만 가장 늦게 번역된 <유대교>가 올해 안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그리스도교>는 2002년에 이종한에 의해 번역되어 “분도출판사”에서 나왔고, <이슬람>은 2012년에 손성현에 의해 번역되어 “시와진실”에서 나왔으며, 이제 곧 출판될 <유대교>는 본인과 이응봉, 박영식에 의해 번역되어 역시 “시와 진실”에서 나올 예정이다. 2년 동안의 산고 끝에 옥동자의 출산을 기다리는 나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 더 설레게 된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고전이 또 한권 나온다고 생각하니, 벅찬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

<유대교>에 관한 책 한권 때문에 왜 그리 흥분하느냐고 사람들은 묻고 싶을 것이다. 앞으로 나올 책을 대하게 될 때, 독자들의 이런 호기심과 궁금증은 금방 해소될 것이다. 미리 말해 둔다면, 일단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 종전의 책보다 훨씬 더 방대하다. 그 일차적인 이유는 유대교의 역사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역사보다 훨씬 더 장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참고 자료도 당연히 가장 풍성할 수밖에 없다. 논란거리가 되는 많은 부분을 가감 없이, 때로는 한스 큉의 관점에 따라서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와 토론을 위한 폭넓은 마당을 제공해 준다.

내가 번역한 부분은 제1부 “역사”에 관한 부분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인위적인 도식인지, 아니면 역사의 필연인지, 기이하게도 한스 큉은 세 종교 모두를 다섯 가지 패러다임으로 분석해 놓았다. 물론 각 종교가 패러다임 전환을 이룬 시기와 이유와 과정은 상당히 다르다. 그럼에도 서양의 3대 종교가 동일하게 다섯 단계를 거쳐 변화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간의 종교와 문화의 발전은 결국 동일한 패턴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역사결정론의 분명한 증거일까? 인간은 필연적으로 같은 방향과 목적을 향해 진화해 나간다는 생물학적인 결정론의 한 가지 증거일까? 아니면 역사는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고 설계하신 과정과 목적 아래 진행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적 섭리 신앙의 현저한 사례일까?

좌우간 이 책에서 큉은 유대교의 역사와 사상에 관한 수많은 자료들을 단순히 나열하지 않고, 시대와 사람들마다 고민해 온 많은 사안을 치열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큉은 다양한 역사적 현상을 하나의 고정된 관점으로 통일하거나 복잡다단한 문제에 대해 획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다양한 관점에서, 심지어는 상대방의 관점에서 자신을 냉철하게 되돌아보기를 촉구한다.

책을 구독할 독자들의 폭은 상당히 넓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단 구약성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은 필독서가 될 것이다. 신약성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뿌리로부터 나왔을 뿐만 아니라, 항상 유대교와 갈등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로부터 받은 오해와 박해에 비한다면,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로부터 받은 오해와 박해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약하다. 유대교의 역사는 피와 눈물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인데, 그 중에는 그리스도교가 남긴 해악과 죄악도 결코 작지 않다. 물론 큉은 유대교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유대교의 편견과 오해를 교정하기를 강하게 촉구한다. 이런 점에서도 이 책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상당히 유익한 책이다.

2천년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이 분명하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의 역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참고서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이 책의 가장 폭넓은 독자들은 유대(교)인이나 그리스도(교)인이기보다는 정치가와 외교관일 것이다. 물론 교육학자, 심리학자, 종교학자 등도 이 책에서 많은 정보와 지혜를 얻을 것이다. 부족한 나의 손으로 세계적인 명저를 또 하나 번역했다는 기쁨도 적지 않지만, 후학들과 아름다운 협력을 할 수 있었다는 점도 매우 감사할 일이다.

한스 큉이 이렇게 놀라운 대작을 연이어 만들어낼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분명히 그의 튼실한 건강, 치열한 문제의식, 예리한 분석력, 엄청난 집중력, 풍부한 인프라 등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가 결혼하지 않고 가정을 거느리지 않은 가톨릭 신부라는 점도 큰 장점이 되었을 것이다. “불행 중의 다행”처럼 그가 교황청으로부터 교수직을 박탈당한 것이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그가 시간적, 정신적으로 훨씬 더 자유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구열은 도리어 더 치열해졌을 것이다. 제도권으로부터 자유로운 처지에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연구하고 발언할 수 있었던 그의 처지가 도리어 부럽기도 하다.

가장 깊은 학문을 탐구해야 할 한국의 대학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취업 학원으로 변질되었고, 가장 자유로워야 할 대학의 교수들은 교육부의 통제(채찍과 당근)에 길들여지고 생존에 허덕이는 불쌍한 노예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교수들은 잡다한 행정과 날로 늘어나는 강의와 학생 지도 속에서도 매년 1-2편의 논문을 써내야 하니, 언제 좋은 논문과 명저를 쓸 수 있겠는가? 교수들의 논문은 오직 두 세 사람만이 읽는다고 말한다. 논문의 저자와 이를 평가하는 사람들만이 논문을 읽고 버린다는 뜻이다. 이러니 논문의 내용도 매우 부실할 수밖에 없다. 논문을 쓰고 평가한 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대부분의 논문은 진부하기 짝이 없고, 좀 심하게 말하면, 쓰레기 더미로 던져질 졸작과 같은 것이다. 이를 개선할 의지는 교육부에는 전혀 없고, 대학에도 거의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가 어떻게 명저를 쓸 수 있겠는가? 한탄만 하고 지내기에는 우리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