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의 죽음에 관한 단상

오 ... 노 ...!!!!

뻔뻔하고 야비한 놈들은 끈질기고 더럽게 목숨을 잘 버티며 잘 살아가는데, 왜 저런 분들은 쉽게 목숨을 버릴까? 안타깝고 슬프고 괴롭다. 나도 따라갈 수 없으니 ...이제 누구를 믿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나? 악인이 승승장부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그마나 작은 희망을 주던 분들이 연달아 목숨을 버렸다. 노무현을 뒤따라 노회찬도 이 더러운 세상을 등졌다. 나는 무슨 힘으로 이 더러운 세상을 버텨야 하나? (2018년 7월 23일)

 

노회찬의 죽음을 애도하며

 노회찬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은퇴 준비를 위해 잠시 중단했던 아침 단상을 다시 써본다. 어제 나를 통해 비보를 접한 아내는 노무현의 갑작스러운 서거 때와 마찬가지로 슬픔을 못 이겨 눈물을 흘렸고, 나는 남자답게(?)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페북과 신문을 보니, 여전히 그의 비보에 대한 애도와 추도, 해석이 난무하고 있다.
  나는 한 정치가의 죽음을 놓고 왈가불가할 자격과 능력이 전혀 없다. 그와는 달리 나는 지금까지 줄곧 입으로만 정의와 진보를 외쳐온 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복잡다단한 정치와 심리 현상을 제대로 분석할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는 현실을 제대로 해석하기는커녕 현실의 모순을 조금이라도 극복할 무기도 갖추지 못한 순진한 이상주의자이며, 모조품 무기를 들고 허상을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와 같은 사람이다. 그래도 글도 꽤 큰 힘을 발휘한다고 확신하는 나는 지금도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노회찬은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서 이른바 출세가도를 줄곧 달려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민중 속으로 내려가서, 말과 행동으로 진보적인 이념을 실천하려고 투쟁했던,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존경스러운 정치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처럼 그의 죽음도 매우 아깝고 슬프게 여겨진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뜨겁고 순수한 이상이 현실의 차가운 벽 앞에서 무참히 좌절된 것을 무척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몰염치한 정치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이상대로 행동하려고 했던 그답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단호히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 속에 그런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입게 될 정치적 타격보다는 진보 세력과 특히 정의당이 입게 될 타격을 예상하고 매우 괴로워했을 것이고,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이런 비극만은 막겠다는 결연한 심정으로 자살을 결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인다. 아마 노무현도 그랬을지 모른다.
  여기서 나는 2천 년 전에 예수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신학자로서 진지하게 다시 고민해 본다. 그의 죽음은 분명히 타살이었지만, 성서가 증언하는 대로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죽음의 성격을 분명히 띠고 있었다. 만약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부활의 경험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더욱이 그의 죽음의 의미는 매우 퇴색하고 그의 영향력도 급속히 소멸했을 것이다.
  예수가 자신의 부활을 예견하거나 예언했든 아니했든, 그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도, 아니 바로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더 강력하게 앞당기려고 시도했다고 나는 믿는다. 예수는 물론 자신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온 수많은 비난과 누명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골고다 언덕으로 뚜벅뚜벅, 아니 비틀비틀(?) 걸어갔다.
  부활 경험으로 인해 그의 비범한 삶과 특히 그의 고귀한 희생적 죽음은 더 아름답게 회상되었고, 완전히 망각되거나 억압될 뻔했던 그의 삶과 특히 그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더 찬란한 조명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가 일으켰던 하나님의 나라 운동은 이 세상에서 가장 혁명적이고 가장 강력한 변혁을 가져왔다. 지금도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점에서 예수처럼, 그리고 전태일을 비롯한 수많은 의사(義士)와 열사(烈士)처럼 노회찬도 자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자신의 죽음을 통해 희망의 돌파구를 더 힘차게 열어준 위대한 정치가로 길이 기억될 것임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품었던 아름답고 위대한 이상을 싸늘한 무덤 속에 묻어 두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우리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비록 그는 한순간에 갔지만, 그의 꿈은 영원히, 그리고 더 활활 타오를 것이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간 그를 품에 안아 주시고 한없는 위로와 상급을 내리시기를, 그리고 깊은 슬픔 속에 잠긴 유가족과 동지들과 친구들에게도 크나큰 위로와 새로운 희망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주 예수의 나라가 곧 오리라, 오리라! (2018년 7월 24일)

 

오늘은 좀 한가한 편이어서 노회찬의 죽음과 관련된 글을 쓰거나, 나의 은퇴기념 저서의 판촉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유기성 목사의 글(설교?)을 보게 되었다. 동성애를 비롯해서 현안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그의 진지한 자세가 존경스러워 보인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껄끄럽거나 손해를 볼 일에는 발언을 삼간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공인으로서 공적인 일에 대해 용기 있게 발언하는 그의 태도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비록 그의 발언을 전부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동성애에 관한 그의 발언에 대해서도 많은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그의 성급한 결론이 매우 허술하고 불편하게 다가온다. 특히 노회찬의 죽음에 관한 그의 발언은 매우 진지하지만, 매우 불쾌하게도 들린다.
  그가 훌륭한 정치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섣부른 자살미화를 우려하는 점에는 분명히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단지 죄책감을 해결하지 못해서 비성서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단편적이고 일방적이다. 자살은 단지 죄책감 때문에만 일어나지 않는다.
  비록 노회찬이 죄책감에 눌려 자살했더라도, 그의 죽음을 함부로 비판할 자격이 그에게 과연 있는지 묻고 싶다. 그는 정의롭게 살기 위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회찬만큼 진지하고 치열하게 싸웠는가? 설교 강단과 목회 현실이 세상 정치의 현실만큼 그렇게 진지하고 치열한가? 그가 노회찬처럼 힘들고 위험한 현실에 뛰어들어 보기라도 했는가?
  그리고 자살은 대개 타살이다. 명백하고 완전한 자살이라도, 그가 목회자와 기독교인으로서 동정과 아픔을 더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 더 성서적인 태도가 아닐까? 그는 결코 자살하지 않겠지만, 누가 알겠는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 아래서 귀한 목숨을 죽음에 던지는 자의 고통과 처절한 현실을 그가 조금이라고 알기나 할까? 물론 나도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그의 자살은 단순히 죄책감 때문에만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유 목사는 그의 자살을 더 심층적으로 해석하거나 열린 자세를 취했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그리고 인류사에서 자주 일어난 남을 위한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자살에 대해서는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가 먼저 예수님부터 비판했어야 옳다. 그의 말대로 예수님은 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소중한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는지”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다. 예수님은 남을 위해 그렇게 죽어도, 우리는 그렇게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모든 타살이 다 나쁜 것이 아니듯이, 모든 자살도 다 나쁜 것이 아니다. 물론 나는 자살과 타살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남의 타살이나 자살을 쉽게 단정하고 단죄하고 싶지도 않다. 삶보다 죽음은 더 무겁고, 더 신비하지 않은가? 오늘은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하고, 우울하다. (2018년 7월 24일)

 

내가 노회찬의 죽음과 관련하여 예수의 죽음까지 덧붙여 설명했더니, 많은 분들이 지지와 찬성을 보내주셨지만, 어떤 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셨다.
  노회찬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살했는데, 왜 그의 죽음을 미화하는가? 예수의 죽음이 노회찬을 비롯한 의로운 자들의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에 대해 짤막하게 대답해 보겠다.
  비록 노회찬이 자신의 잘못을 괴로워하여 자살했더라도, 이것조차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수많은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조차 이보다 훨씬 더 큰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뻔뻔스럽고 태연스럽게 살아가는 현실에 비하면, 노회찬은 훨씬 더 양심적이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점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그가 자발적으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곁으로 내려가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작은 실수가 뭐 그리 대수인가?
  예수의 죽음을 인간의 죽음과 나란히 놓거나 비교하는 것을 매우 거북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편이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 예수는 홀로 인류의 죄를 속죄하려고 피 흘려 죽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비록 예수의 속죄 능력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널리 전하려고 고난과 죽음을 당할지라도, 이것은 예수의 죽음처럼 남을 속죄하는 고난이 될 수는 없다.
  “형벌대속설”이라고 불리는 이런 구원론을 오랫동안 믿었던 나는 인간이 예수를 대신하거나 모방할 수 없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이 구원론은 여러 유형 중의 하나일 뿐이며, 결코 유일무이한 이론 아니다. 그리고 이 이론은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비판을 받고 있다.
  구원론의 다른 한 가지 유형으로서 이른바 “승리설”이 있다. 예수는 자신의 몸을 속전으로 내어주어 마귀의 노예가 된 죄인을 해방했다. 일종의 상업적 거래인 셈이다. 어떤 교부들은 심지어 예수가 마귀를 속였다고 말한다. 여하튼 이 이론은 마귀와의 투쟁 끝에 얻어낸 승리를 강조하며, 그리스도인들도 예수가 이룩한 승리에 참여하여 지금도 악과 투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 이론은 고대의 신화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고, 그래서 현대인이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이론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죄의 뿌리인 죄악의 세력을 정복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예수가 거둔 승리는 그의 제자들 속에서 계속 일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앞의 이론과는 달리 구원을 위한 인간의 참여와 행동을 강조한다. 나는 이 이론이 역사적 예수의 모습에 훨씬 더 가까운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예수를 따르면서 예수처럼 투쟁하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투쟁은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죽음처럼 자발적인 희생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나는 모든 불의에 맞서 싸우다 고난과 죽음을 당한 자들 속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지금도 계속 일어난다고 확신하며, 그래서 그렇게 죽어간 자들을 높이 존경한다. (2018년 7월 26일)

 

          노회찬 님이 떠나시는 날.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아코디언을 쳐본다.
          맘따라 몸도 흔들리고
          손가락도 함께 흐느낀다
          님이여, 잘 가시라.
          나도 언젠가 스러지겠지만
          푸른 솔처럼
          우리의 꿈은
          날로 더 푸르게 뻣어나겠지.
          삶도 죽음도 한순간이지만,
          오직 사랑만은 영원하리니
          하나님 안에서 영면하지 말고
          우리의 사랑이 시들지 않도록
          천둥과 번개로 깨워주오.
          나도 님의 길을 따라
          오늘도 내일도 ...
          사랑의 길을 걸어가오리다.

어제 밤늦게 그리스 이카리아 섬에 사는 주민들의 장수 비결에 관해 보도하던 TV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장수의 비결은 꾸준한 운동과 노동, 채식 위주의 식습관, 따뜻한 교제, 목적이 있는 삶 등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를 보다가 아내가 “당신이 무얼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당신이지!”라고 아부 발언을 던졌더니, 더는 묻지 않았다. 진심 여부를 떠나서 마음으로 흡족했나 보다.
오늘 아침에 페북을 열다가, 상당히 보수적인 어느 목사님이 내게 쓰신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나는 아내 다음으로 글쓰기를 제일 좋아한다. 그러니 오늘도 한 마디라도 안 쓸 수가 없다. 앞의 글만을 소개하면 이렇다.

어느 조직신학 교수님의 글을 읽고
○○○ 교수님 글 잘 읽었습니다. 조직신학교수님으로 한 평생을 연구하시고 보수성향의 신학대학교에서 가르치셨고 은퇴하시면서 조직신학에 대한 큰 분량의 세 권의 책도 쓰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교수님의 견해나 노회찬씨의 죽음에 대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계하여 말씀하심은 예민한 문제이기에 자제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장로교의 교수로서 형벌만족설을 가르쳤지만, 승리설이 더 타당하다고 하시면서 예수님과 마귀와의 거래(deal)를 통해 마귀를 제압하고 승리하셨다는 것과 연계한 노 씨의 죽음을 이야기 하셨는데, 신학적인 견해니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으나, 진보적인 민중신학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으신 것 같습니다.

언뜻 보면, 민중신학과 매우 닮아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 이 이론은 가장 오래된 고대의 신학 이론이었다. 내용적으로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이레네우스, 아타나시우스, 오리게네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크리소스쿠무스,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고대의 거의 모든 교부들이 예수의 죽음을 악마와의 투쟁과 승리의 관점에서 해석했고, 루터에게도 이런 요소가 강하게 깔려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우리에게 오래 익숙해진 “보상만족설”은 중세기에 캔터베리의 주교 안셀무스가 주장한 이론이다. 이를 보완한 “형벌만족설”도 신학적, 논리적으로는 같은 노선 위에 서 있다. 이 이론이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었고, 현대신학자들 가운데서는 바르트, 브루너 등도 이런 종류의 이론을 대변했다. 대체로 칼뱅주의 신학자들이 이 이론을 선호한다. 심지어 극단적 칼뱅주의자들은 다른 이론을 극도로 혐오하며, 심지어 이단이라고 몰아붙이곤 한다.
  오늘 나의 글에 대해 우려를 표하신 분도 그런 전통 속에 계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이 이론은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이른바 “주관적 감화설”을 주장한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현대의 수많은 신학자들도 이를 비판한다. 한스 큉은 두말할 것도 없고, 몰트만도 어느 정도 그러하며, 해방신학자들은 이를 완전히 거부한다. 나는 분명히 해방신학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지만, 그보다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죽음을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이론을 따르려고 한다. 비록 고대교회의 이론은 오늘날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기는 어려운 신화적, 허구적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한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오랫동안 한 사람이 아무런 고민과 비판이 없이, 아니 열렬히 고수하고 주장해 오던 이론이 비판이나 공격을 받을 때, 심리적으로, 그리고 목회 현장에서도 혼란과 곤란을 겪는 것에 대해서는 물론 유감을 표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신이 소장한 물건이 진품이라고 확신해 왔지만, 혹시 그것이 짝퉁은 아닌지 진지하게 점검해 보기를 바란다. 나도 지금까지 짝퉁을 감별해 내고 진품을 찾으려고 애쓰는 중이다. (2018년 7월 28일)

   CBS노컷뉴스 : 개신교 목사들은 노회찬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