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영 교수님께 드리는 글

 

 

 

얼마 전에 우리는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처음 만났죠? 그때 처음 본 교수님의 얼굴은 참으로 맑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의 심성도 맑고, 학문도 맑으리라 확신했습니다. 교수님이 쓰신 글을 읽어보니, 두 가지 점에서 저와 매우 비슷한 생각과 행동으로 살아가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먼저 자살에 대한 교수님의 설명은 여러 분들로부터 지지와 공격을 받은 저의 설명을 암시하는 듯, 저의 입장과 매우 가까이 맞닿아 있었습니다. 특히 저를 공격했던 분들은 교수님의 글을 통해 죽음과 자살의 심층적, 다층적 차원을 새롭게 깨닫기를 다시 바랍니다.

교수님이 대학에서 쫓겨나신 사건도 저의 과거 사건과 겹쳐 무척 마음이 아프지만, 매우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교수님도 그려셨지만, 저도 과거에 이런 종류의 정치적인 자살을 자초한 셈입니다. 나중에 저의 책에 소상히 밝히겠지만, 저도 비굴하게 살기보다는 당당히 죽기를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시일은 오래 걸렸지만, 저는 결국 정치적으로 부활했고, 교수님도 머잖아 그리될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어이가 없게도 국가의 법이 교회의 법(주먹?)보다 훨씬 더 정의롭다는 사실을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적으로 부활한 것도 바로 국가의 법 때문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무지하거나 더 썩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은 대다수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아니라 정치꾼 목사들, 패거리 목사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다수의 전자들보다 소수의 후자들에 의해 휘둘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다수들의 침묵이나 동조 아래 소수들의 전횡과 폭거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한국교회는 정말 치유의 희망이 없는 심각한 질병과 더 깊은 나락의 늪에 빠져가고 있는 셈입니다.

손 교수님! 당장은 여러모로 힘드시겠지만, 머잖은 승리를 바라보며 오늘도 힘을 내십시오. 역사의 진정한 발전은 이런 종류의 희생 때문에 가능했음을 도리어 감사히 여기면서, 주님이 걸어가시고 분부하신 좁은 길을 우리도 함께 힘차게 걸어갑시다! (2018년 8월 3일)

 

아래는 손원영 교수님이 2018년 7월 28일에 자신의 페북에 올렸던 글이다.

 

<자살과 파면>

* 주의: 매우 긴 글임

1. 이번주 대한민국 최대의 뉴스는 노회찬 의원의 자살이었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파면무효확인소송(1심) 결심공판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은 마치 한 사건처럼 엮여져서 모두 적어도 나에게 매우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다시한번 노회찬 의원의 명복을 빌며, 그의 희생이 결코 헛된 죽음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노 의원의 죽음 이후 요 몇 일간, 많은 저명한 분들이 그의 죽음을 놓고 한창 페북이나 언론을 통해 논쟁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죽음은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또 극단적인 죽음(자살)의 형태를 띠고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죽음을, 특히 자발적 죽음의 한 형태인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 모름지기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자살은 어거스틴 이후 매우 불경스런 것으로 오랫동안 이해되어 왔다. 왜냐하면 자살은 신적 영역에 속한 생명을 인간 자신이 임의로 빼앗는 것으로써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종의 신성모독죄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이 절대화되어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자살을 죄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자살을 권할 일은 절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도식("모든 자살은 죄다.")으로 단순화하기에는 죽음(자살)의 지층이 매우 다양하다는 점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성서에 보면, 자살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 자기의 죄의 무게를 양심상 더는 감당할 수 없어 죽음을 택하는 소위 "자기보속적인 자살"이 있는가 하면(예: 가룟 유다의 자살),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심정으로 자기의 생명을 내 놓고 죽음의 불구덩이로 스스로 뛰어드는 "자기희생적 자살"(우리야, 다니엘, 에스더 등-물론 이들이 실제로 다 죽은 것은 아니지만)이 있다.

그리고 그 양자 사이에, 즉 양심과 자기희생 같은 거룩한 가치 지향적인 자살 사이에, 수치심이나 인간적 고통(특히 물질적, 정신적)의 도피처로써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처럼 다양한 자살의 경우를 어느 하나로 단순화하여 자살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은 성경의 본래 의미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3. 특히 나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에서 그동안 교회가 인류의 죄를 위한 신적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측면만 강조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 이외의 측면도 간과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싶다.

특히 예수의 죽음이 로마 및 유대성전의 권력층에 의한 살해란 측면과 더불어, 예수 스스로 죽음을 피하지 않고 죽음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는 소위 "자발적 죽음" 곧 자살의 측면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고 본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이 구약의 전통에서도 강조한 자기희생적 사랑의 실천으로서 "자발적 죽음"(이타적 자살, 죽음의 각오 등)이나, 혹은 사회구조(조직)의 개혁을 위한 투쟁적 자기희생(해방적-정치적 자살)의 측면도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전자는 예수의 죽음이 심청이의 경우처럼 예수 스스로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이웃을 위해 당당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타적 자살이며, 후자는 예수의 죽음이 당시 독점적 성전 권력에 대한 해방적 저항의 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자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죽음(특히 자살) 이해는 죽음의 동심원을 따라 여러 개의 물결이 함께 겹쳐지는 모습이랄까? 그래서 그동안 자살을 모두 악으로 규정한 단순 논리를 넘어서 죽음의 자기선택권(특히 최근에는 "존엄사"로 불림)에 이르기까지 죽음(자살)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자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강조하는 중요한 강조점은 그것이 나보다 더 큰 이웃의 생명을 살리는 이타행이거나 사회구조의 변혁을 위한 해방적 실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4. 끝으로 나는 금번 나의 교수파면관련 소송을 성찰하면서, 나의 파면은 일종의 "자발적 자살"의 측면이 있음을 새삼 고백하고 싶다.

주자하듯이 교수사회에서 "파면"은 사형선고로 불린다. 왜냐하면 교수가 비행의 이유로 파면되면 5년간 동종업계에 취직을 못하고 연금도 받지를 못하는 최고로 가혹한 형벌이기 때문이다. 더욱 나쁜 것은 학문적으로도 불량한 자라는 낙인이 찍혀서 영원히 학계에서 추방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립대학에서는 많은 경우, 파면을 앞두고 사표를 내도록 은밀히 권하거나 혹은 조직에서 조용히 잠시 사라지도록 배려하고 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 당국이나 동료 교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도 사표쓰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서 파면은 자살로써, 내가 파면을 당하면 취직이 불가능해 생계가 막막하고 아들의 대학등록금도 당장 걱정해야 되기 때문이다.

나는 고민 끝에 나이들면 아내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그가 원하는 대로 사표를 써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곧 학교에 가서 제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사표 쓴 그 날부터 아프기 시작하여 거의 2주 넘게 평생 처음으로 꼼짝 못하게 아프게 된 것이다. 몸살 감기로부터 시작하여 폐렴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아마도 내 양심이 사표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사표를 쓴다는 의미는 개운사를 도우려했던 나의 행동을 후회한다는 의미요, 또 불의와 타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끙끙 앓고 있는데, 아내가 불쌍한 듯 나를 처다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언제 당신이 내 말 듣고 살았어? 당신 마음이 편한 대로 해!" 이것은 사표가 아니라 일종의 자발적 파면에 대한 허락 곧 "자살윤허"로 이해되었다.

결국 나는 그렇게 파면되었다. 나는 나의 교수파면이란 일종의 자발적 자살로써 불의한 학교당국에 저항하고 싶었고, 또 더 나아가 개운사를 돕는 행동을 통해 기독교 복음이 결코 배타적인 개독교의 폐쇄적 억지주장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구원과 자비의 진리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파면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 "어리섞은 개죽음과 같은 짓"을 했다고 간혹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그 어리섞은 자발적 자살을 선택했다. 재판을 통해 나는 반듯이 이기고 부활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자살(파면)은 종교적 신념이 좀 다르다는 이유로 여전히 모진 학대를 가하는 폐쇄적인 종교집단에게 보내는 나의 경고이자, 또 나와 같은 희생자가 다시는 이 땅에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후의 저항수단이었다. 따라서 나는 재판을 통해 반드시 이겨서 멋진 판례를 하나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주장이 양심과 헌법 그리고 성경에 결코 위배되지 않음을 재판부에 의해 명확히 증명되리라 믿는다.

5.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서문에서 인용한 "밀 알 한 톨이 땅에 떨어져 썩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말씀처럼, 노회찬과 손원영의 죽음이 좀 격은 다르지만 결코 헛된 죽음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