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광풍과 사회주의 논쟁

 

(2019년 9월 11일)

국을 둘러싸고 일어난 광풍은 무서운 태풍에도 완전히 밀려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성을 되찾고 태풍의 피해를 입은 이웃의 처지도 좀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조국이 아무리 큰 돌풍을 몰고 왔어도,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조국 후보가 법무부 장관이 되고 온갖 의혹이 해명되거나 반박됨으로써 광풍이 조용해진 점도 없지는 않다. 조국을 장관으로 임명하면 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은 그야말로 허풍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조국 가족이 재판을 받아야 하고 의혹도 해명되어야 하므로 조국 문제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계속 남을 공산이 크다.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의 적법성과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이번에 내가 주목한 진기한 하나의 현상은 바로 ‘사회주의’ 논쟁이다. 김진태가 조국을 불순한 사회주의자로 몰아갔지만, 조국의 대답은 매우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 사회에서 이념 논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시민사회가 조국의 발언을 충분히 소화할 만큼 매우 성숙했다는 증거일 것이고, 이른바 맥카시 광풍이 얼마나 허망하고 사악한지도 오래 전부터 입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지식인들과 목회자들이 사회주의를 여전히 민주주의의 원수로 여기고 사회주의를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면서 극렬하게 비난하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실 공산주의도 종류 나름이다. 공상적 공산주의와 무신론적 공산주의도 있었지만, 기독교적 공산주의도 분명히 존재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바로 신앙적 공산주의를 실험했고, 오늘날에도 불신자들과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서도 공동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초래한 폭력과 전쟁, 독재와 부패,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의 몰락 등으로 인해 오늘날 공산주의라는 개념을 공공연히 애호하는 사람은 극도로 미미해졌다. 그러나 사회주의 이념은 여전히 살아서 작동하고 있다.

공산주의 국가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도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하고 더 나은 공동체 실현을 위해 사회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왜곡하는 지도자들이 왜 엄연히 존재하는가? 그들은 무식하거나 이념적으로 왜곡되었거나 자본주의에 경도되거나 자본주의를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자일 것이다.

내가 오래 전에 번역한 책 “칼 바르트의 정치신학”을 읽어 보라. 바르트가 신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자본주의를 얼마나 맹렬히 공격했는지를 알게 되면, 아마도 수많은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라 자빠질 것이다. 이른바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열렬히 지지한 자들이었다면, 이른바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모두 기독교적 사회주의를 열렬히 지지한 자들이었다는 사실도 상당히 당혹스럽게 할 것이다. 좌우간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쓴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 영원할 것 같았던 자본주의도 새로운 문명의 도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본주의 숭배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매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