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 ?

(2019년 12월 25일)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는 성탄절 전날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온갖 흥을 돋우었을 것이다. 나도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놀랍고 혁명적인 것은 바로 인간과 완전히 다른 하나님이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존재로 태어났다는 이 사건, 임마누엘의 사건이 아닌가? 예수의 삶과 선포도 그러했지만, 그의 탄생은 완전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고 모친 마리아가 전해 준다. 아기 예수로 인해 세상의 기존 질서가 완전히 뒤집힌다는, 아니 벌써 완전히 뒤집혔다고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기존 질서가 이렇게 한꺼번에, 이렇게 기적적으로 뒤집힌다는 말은 여태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은 기존질서의 전복을 가져오기는커녕 기존질서에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았다. 아무도 예수의 탄생을 알아채지 못했고, 아무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들판의 목동과 동방박사 이야기는 문학적 상상력과 신학적 통찰력의 산물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장차 엄청난 혁명을 도모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는 은밀하게, 누추하게 이름 모를 공간에서 쓸쓸히 태어났다. 그로 인해 세상은 아무런 손해나 충격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가 선포하고 실천한 것은 그야말로 혁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예수보다 더 큰 혁명을 일으킨 자가 있었는가? 예수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고, 오늘도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도 참으로 놀랍고 기이하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암담하다. 어제도 대구의 한 주택에서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몇 년 전부터 생활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례들이 계속 이어져 왔다. 송파 세 모녀 사건(2014년) 이후에 올해도 인천 계양구, 양주, 봉천동, 성북구 등에서 생명을 포기한 사람들이 연거푸 생겨났다. 그러니 성탄절이 밝아 왔어도, 나는 성탄의 노래를 차마 부르지 못하겠다.

남한의 인구수와 다른 나라 사례와 비교할 때, 여전히 적은 사례라고 자위해야 하는가? 야수적인 자본주의사회에서 마땅히 감수해야 할 대가와 희생이라고 합리화해야 하는가? 누가 이런 사회를 만들었고, 누가 이런 사회적인 타살을 조장하는가? 예수가 앞당겨 왔다는, 아니 우리 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다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살가운 피붙이와 정다운 이웃을 끝까지 사랑하고 돌아보는 세상이 아니라면, 대관절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인가? 만약 우리가 이런 것을 말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허황하고 거짓된 담론과 환상이 과연 어디 있는가?

만약 우리에게 밥이 없다면, 자유와 신앙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만약 우리가 밥을 함께 먹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도 무슨 유익이 있으랴? 자유와 신앙이 밥과 전혀 무관하다고 누가 말하는가? 굶주린 자는 자유와 신앙조차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부르짖는다. 비록 자유와 신앙이 없어도, 비록 교회와 국가가 없어도, 모두가 서로를 돌아보고 아끼고 먹이는 곳에 나는 살고 싶다. 이처럼 불행하고 불쌍한 죽음이 더는 없는 세상에 나는 살고 싶다. 이런 일이 끊임 없이 일어나는 곳이라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좌파와 우파, 복음주의와 자유주의가 대관절 무슨 소용이 있으며, 더욱이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가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만약 소자를 돌보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고 소자를 돌보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면, 도대체 예수쟁이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주님, 주님”이라고 아무리 높이 외쳐도, 연약한 자를 돌보지 않는 자들은 예수와 전혀 무관한 자들이라는 말씀이 오늘도 나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른다!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왔지만, 우리는 아직도 지옥을 만들고 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