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실성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 대답은 오늘 날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으며 깊이 동요되고 있다. 신앙이 사적이고 임의적인 견해로 변한 서구의 다원주의(多元主義)가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필요 없는 것과 대수롭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세속화(世俗化)가 존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대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그리고 지구와 다른 생명체들에게 고난의 역사였기도 하고 지금도 그러한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의 폭력 아래 있는 사람들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자들을 위해 평화와 정의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인류는 히로시마 이후에도, 그리고 이 지구는 체르노빌 이후에도 여전히 미래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불안해졌으며,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지구를 위해 희망을 가져다 줄 자를 찾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고 있다. 오늘 날 우리의 절망 앞에서 우리는 어제의 해답들을 실험해 보고, 그것들을 우리 시대로 옮겨 보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것들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면, 우리는 새로운 해답들, 우리 자신의 해답들을 실험해 본다. 우리는 그것들로써 삶을 꾸려 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이 얼마나 오래 지탱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디서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지도 경험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비단 오성(悟性)만의 대답이 아니고 언제나 생활의 대답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일은 동일한 내용 즉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 있는 생활의 두 측면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대답은 우리가 삶과 죽음을 걸 수 있는 그러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 실천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리스도론의 신빙성은 그리스도 실천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하나님도 온 마음과 온 뜻으로만 믿을 수 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 마음과 온 뜻으로 믿는다.

그리스도는 나에게 누구인가? 나는 이 개인적 질문을 일반적인 사상으로써 회피하려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개인적 체험으로써 시작하려고 한다. 1945년에 나는 벨기에의 한 비참한 포로 수용소 안에 있었다. 독일 제국은 무너졌고, 독일의 문명은 아우슈비츠 때문에 망가졌으며, 나의 고향마을 함부르크는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내 자신의 처지는 다음과 같이 여겨졌다. 즉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꼈으며, 나의 젊은 시절의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나는 내 앞에 아무런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처지에서 나는 한 미국인 군목으로부터 성경책을 얻어서 읽기 시작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구약성서의 탄원시였다: "입을 다물고 벙어리가 되어 가만히 있으려니 아픔만 더욱 쓰라립니다... 조상들처럼 나 또한 당신 집에 길손이며 식객입니다"(시편 39 편).

그 다음엔 수난 이야기가 내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예수의 절규에 이르자, 나는 모두가 나를 버릴지라도, 나를 이해하며 내 곁에 있는 한 분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외침이기도 했다. 나는 고난당하고 시련당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예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에게 이해받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예수야말로 우리의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과 같은 친구임을 깨달았다. 그는 포로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준다. 그는 우리를 내리누르고 우리에게서 모든 미래를 앗아가는 죄짐으로부터 구원해 준 자이다. 그 당시에 인간적으로 볼 때는 희망할 거라곤 거의 없는 상황에서 한 희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남이라면 아마도 기꺼이 삶을 마감했을 뻔한 상황에서 나는 삶의 용기를 붙잡았다. 고난 중의 형제요 죄짐을 덜어 준 구원자인 예수와의 이러한 초기의 만남은 그 날 이래로 줄곧 나를 떠나지 않았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나에게 그리스도이다.

나의 생활의 공적이고 개인적인 갈등에서 나는 지상적(地上的) 예수의 현존도 이해하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멸시받는 사람들을 용납하는 자가 자신을 뒤따르라고 부르며, 그의 희망과 임무로 가득한 삶으로 안내한다. 나에게 이러한 삶을 확신시켜 준 것은 무엇보다도 "원자핵 살상"에 대한 초기의 저항이며, 그 다음엔 이후의 평화운동이다. 비교적 늦게나마 알게 된 사실은 이 지상의 예수, 뒤따름과 하나님 나라의 예수가 유대인의 예수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의 대화는 내게 이를 보는 눈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이 대화는 예수의 새로운 하나님 체험에 뿌리둔 나의 그리스도교적 정체성(正體性)도 내게 보여 주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눅 4,19). 이 하나님의 오늘이 있기에, 그의 지상의 생활은 온통 메시야적이었고, 이스라엘의 희망으로 밝히 빛났으며, 만 백성들을 위한 희망으로 빛을 발했다. 즉 그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요 만 백성들의 구세주이다. 나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에 지상의 예수의 이러한 현존이 결여되어 있음을 늘 유감스럽게 생각해 왔다. 어째서 그것은 "나시고"와 "고난받으사" 사이의 단순한 한 쉼표(콤마)로 축소되고 말았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삽입하거나 최소한 덧붙여 생각할 필요는 없을까?: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 받으시고

성령이 충만하여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버림받은 자를 용납하시며

만 백성이 구원을 얻도록 이스라엘을 부르시며

온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일찍이 예수를 함께 고난 당하는 형제로 깨달은 사실과 더불어 내게는 부활신앙이 중요한 것이 되었다. 분명히 일으킴과 일어남의 상징들은 이 세상에 기적적으로 개입하는 하나님에 관한 신화적 표상들 안에서 말하던 고대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형태상으로만 이런 세계상과 관계 있다. 우리의 경험에서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운명지워진 죽음과 대결한다. 내게서 부활신앙은 사랑하는 자와 죽어 가는 자, 고난당하는 자와 애통하는 자의 하나님 신앙이고, 그래서 결코 신화가 아니다. 부활신앙은 죽음에 맞선 사랑의 투쟁에서 그 의미를 얻는다. 우리가 생명 한가운데서 죽음에 맞서서, 그리고 생명이 지금 겪는 억압과 손상에 맞서서 저항할 때, 우리는 이미 여기서 생명의 한복판에서 부활을 경험한다. 사랑 가운데서 부활은 단지 기대될 뿐만 아니라 이미 경험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아무도 그리고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 사랑은 하나님이 만물을 회복하고 바로 세우며 그의 나라로 모을 미래를 바라본다. 이 위대한 희망은 우리의 작은 희망들을 강하게 만들고 바로 세운다. 이것은 생명의 영 가운데 있는 예수의 현존이다.

이 책의 글들은 내가 독일과 다른 여러 나라에서 행하고 매우 다양한 사람들, 그룹들과 함께 토론했던 강연들로부터 생겨났다. 이를 통하여 세 장에서는 성서의 문헌들이 무엇을 보도하는지를 먼저 보고, 그 다음에는 질문과 대답 속에서 신학적인 판단을 내리는 법을 배우고, 마지막으로는 행동의 방향을 묻는 방법이 생겼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완전한 그리스도론을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나의 저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 메시야적 차원 안에 있는 그리스도론", 뮌헨 1989년을 참조하길 바란다. 거기에 자세한 보충설명이 있다. 이 원고를 다듬고 교정본을 읽느라고 수고한 토마스 쿠하르츠와 슈테펜 뢰벨에게 감사한다.

튀빙엔, 1993년 5월 9일 위르겐 몰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