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서문

일의 같은 대학(튀빙엔 대학)의 같은 교수(몰트만) 아래서, 그리고 같은 기숙사 지붕 아래서  공부했던 김명용 박사(장로회신대)가 어느 날 뜻밖에 이 책의 번역을 권했다.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는 꼭 번역해야 할 탁월한 교과서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부족한 내가 이 책을 번역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다. 비록 번역의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귀국 후에 백수(白手)로서 조금 한가롭게 지낼 수 있었던 내가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여,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번역에 착수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아직 보급되지 않았던 그 당시에 번역이란 원서와 원고지와 사전을 번갈아 쳐다보며, 그리고 연필과 풀과 가위를 번갈아 들어가며 작업해야 했던 매우 원시적인 노동이었다. 분량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개념과 표현과 내용은 무척 다양하고, 방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노동을 즐겁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책과 견줄 수 없는 이 책의 독보적인 가치와 비중 때문일 것이다. 조직신학(교의학)의 중요한 개념과 내용을 성서와 신학의 역사를 꿰뚫어가며 명확하게 요약하고, 현대신학의 중요한 주제들을 인물과 사상 중심으로 설명해 나가는 저자의 솜씨가 참으로 뛰어났다.

하지만 어찌 한적함이 노동의 유일한 이유가 되겠는가! 역자가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하인리히 오트(H. Ott)의 『신학해제』를 제외하고는 조직신학을 소개하는 독일어 서적은 전혀 없었다. 이런 형편은 필자가 귀국한 후에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바로 그래서 역자는 힘든 상황 중에서도 자신을 기쁘게 채찍질할 수 있었던 것 같다. 1989년에 출판된 이 책은 지금까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왔고, 지금까지도 이 책을 능가할 만한 책이 여전히 나오지 않은 듯하다. 독일에서 이미 정평이 난 이 책이 한국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역자의 어설픈 번역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이 책의 뛰어난 가치와 독보적인 비중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책의 약점도 점점 더 많이 드러났다. 편집과 인쇄의 과정에서 누락된 문장도 가끔 발견되었고, 필자의 정성과 실력 부족 때문에 잘못 번역하거나 어색하게 번역한 문장도 종종 발견되었다. 더욱이 한국어 어법에 맞지 않는 직역 투의 문장과 애매한 문장도 적잖게 눈에 띄었다. 책의 편집과 디자인도 매우 낡아 보였다. 결정적으로는 이 책을 계속 새롭게 보완해 나가는 저자의 정성을 역자는 제대로 따라잡지 못했다. 그래서 필자는 이 책을 멋있게 되살려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저자는 변화된 상황에 따라 새로운 내용을 적절히 추가함으로써 이 책을 여전히 신선한 책으로 만들어 주었다. 역자인 나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문장을 가급적 짧게 만들었고, 지나치게 긴 문단은 적절히 나누었다. 한문과 고어(古語)를 이해하지 못하는 신세대 학생들과 외국 유학생들을 위해 가급적 쉬운 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종종 나오는 어려운 개념과 용어를 따로 풀이해 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분량은 조금 늘어났지만, 질적으로는 훨씬 더 좋아졌다. 그러므로 이 책은 과거보다 훨씬 더 친근하게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히 읽기 어려운 무거운 주제와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쉽게 덤볐다가 쉽게 던져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천천히 읽어가며 음미해 본다면, 독자들의 신학적 지식은 양적, 질적으로 놀랍게 발전할 것이고, 기대보다 더 풍성한 정신적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가볍고 흥미로운 대중적인 책을 선호하고 있지만,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어찌 마냥 가벼운 존재로 전락할 수 있겠는가? 비록 시대는 점점 더 가벼워지고 천박해지더라도, 신학은 점점 더 깊은 사상과 은혜의 바다 속으로 인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기독교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독자들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하며, 특히 신학의 기초 지식이 부족하거나 신학적 확신이 약한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은 한번은 꼭 읽어보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저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23년 전에는 외국의 출판사나 저자의 동의와 계약이 없이 책이 출판되는 것이 보편적인 관행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책이 허가를 받지 않고 출판되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도 - 한국의 지인을 통해 -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이 모든 책임이 전적으로 나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던 나는 이번에는 반드시 저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 전자 우편을 통해 저자의 동의와 인사말까지 얻을 수 있었다.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아무 조건과 요구도 없이 이 책의 출판을 기꺼이 허락해 주신 저자의 인품에 나는 깊은 감동과 감사를 느낀다. 출판의 불황 속에서도 좋은 책을 꾸준히 펴내시는 최병천 장로님과 이 책을 펴내기 위해 수고하신 모든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한다.


2012년 2월 17일
서울신학대학교 연구실에서
이신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