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후기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1964년)은 지은이를 일약 세계적인 신학자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겠지만, 무엇보다도 현대신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도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사건이다. 비록 몰트만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역사와 종말론"이 차지하는 중심적인 비중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를 가장 분명하고 효과적으로 대변한 신학자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책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에서도 이 책은 1973년에 박봉랑 박사님과 전경연 박사님에 의해 번역되어 소개되었으며, 작년까지 20쇄를 기록할 만큼 독자의 사랑을 많이 받아왔다. 역자의 생각으로는 전문적인 신학서로서 한국과 세계에서 이만큼 많이 읽힌 책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지 어언 40년이 되어 가는 이 즈음에 몰트만과 우리의 사고와 실천 영역은 이제 "역사와 종말"보다는 "자연과 생명" 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와 종말"은 어느 시대에서도 결코 포기하거나 간과할 수 없는 신학의 고유한 패러다임이다. 물리학에서 공간과 시간이 맞물려 있는 것으로 이해되듯이, 신학에서도 "환경과 생명"과 같은 공간적 범주는 "희망과 미래"와 같은 시간적 범주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생명과 환경의 "미래" 혹은 인류의 "종말"을 더욱 심각하게 염려하고 있으며, 20 대 80의 세상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전횡 속에서 무엇이 "역사의 종말"(후쿠야마)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의 신학"은 오늘날 더 큰 비중을 지니고서 우리에게 다시금 다가온다.

하지만 1973년에 출판된 이 책은 과거의 조야한 활자판으로 인쇄되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역자가 특히 안타깝게 생각한 점은 이 책에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너무 자주 눈에 띄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일차적인 이유는 물론 "희망의 신학"이라는 아름다운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이 상당히 심원한 논리와 복잡한 문장을 담고 있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부적절한 번역도 분명히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역자는 저자와 출판사와 상의한 끝에 이 책을 다시 번역하게 되었다.

이 책을 번역하는 중에 역자는 무엇보다도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심원한 논리에 또 한번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몰트만은 역자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지도 교수이셨고 오늘날 독보적인 세계적 신학자이긴 하지만, 5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38세의 새파란 외국인이 쓴 책을 번역하고 있자니, 솔직히 인간적으로 자괴지심(自愧之心)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설령 100살을 먹는다고 해도 이런 책을 쓰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에 압도되어, 작년 한해 동안 치질 수술을 무릅쓰면서 미친 듯이 번역에 매여 달렸다. 감히 단언하건대, 2,000년의 교회사에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이처럼 철저히, 그리고 이처럼 완벽하게 추적하고 해명한 책은 없다! 고로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다시는 그리스도교의 복음, 역사, 종말론 등을 운운하지 말자!

또한 이 책을 번역하는 중에 역자는 이 어렵고 좋은 책을 번역하신 박봉랑, 전경연 박사님에 대해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느꼈다. 박봉랑 박사님은 역자에게 바르트의 신학에 눈을 뜨게 해 주셨던 분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분은 이 책의 부활을 기뻐하시면서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고 계시리라 확신한다. 전경연 박사님은 신약신학을 전공하신 분이면서도, 조직신학 분야에서도 많은 양서를 소개하신 분이다. 성서학자들은 대개 조직신학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문외한인 경우가 많은 점을 고려할 때, 그분은 참으로 존경스러운 학자의 모범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두 분의 덕택으로 역자는 1975년에 이 책을 숙독하고 여백마다 중요한 구절을 새겨 놓았다. 이 번역 과정에서도 역자는 손때 묻은 이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새로운 번역 때문에 두 분의 공로와 이름이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분이 처하셨던 시대적, 언어적 환경 때문에 이 책은 지금 우리의 세대가 읽기에는 너무나 난해한 책으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탁월한 책이 서가와 책방의 모퉁이에 외롭게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역자는 이를 한번 부활시켜 보려는 희망으로 재번역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 책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9권의 독일어 서적을 번역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몰트만의 여러 책들을 읽고 번역한 사람으로서 아마도 이번의 번역 과정은 가장 어렵고도 보람된 과정이었다고 생각된다.

누구에게나 번역은 집필보다 더 어려운 고행의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좋은 책은 계속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도 결코 완벽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재번역은 한국의 신학서적 출판의 역사에서 그리 흔치 않는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책도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다시 번역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단지 역자가 전경연 박사님께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이 자리를 빌려 송구스러움을 표하며, 그분도 양해하실 뿐만 아니라 함께 기뻐하시리라 믿는다.

이 책을 번역하는 중에 마침 표준새번역 개정판 성경전서가 출판되었다. 처음에는 개역성서의 본문을 옮겨놓았지만, 도중에 새로운 번역 문장으로 다시 고쳤다. 성서도 분명히 본문에 더 충실하면서도 현대적 어법에 더 맞도록 늘 새롭게 번역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희망의 신학"의 재번역은 "새로운 성서 개정판"의 번역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자리를 빌려, 이 책의 출판을 위해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몰트만의 말을 인용하면서 끝을 맺을까 한다. 머리말에 소개되어 있듯이, 숨을 쉬는 한, 우리는 희망한다(Dum spiro - spero). 아니 설령 숨을 멈추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바로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오늘 우리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사망의 골고다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그런 중에서도 참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희망의 영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02년 1월 2일, 부천의 성결신학연구소 사무실에서 이신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