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쇄에 부치는 머리말
33년을 넘긴 이 책을 새로운 머리말을 덧붙여 다시 출판하는 것은 당연히 일종의 모험이다. 책도 그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다. 하지만 몇몇 책들은 자신의 길을 가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도 갖는다. "희망의 신학"도 역시 그러하다. 이 책은 1964년에 출판되었다. 1967년에는 영어 번역판이 나왔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 책은 나의 손을 벗어났으며, 그 자신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 역사는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예견한 것도 아니었지만, 다양한 형태로 내게 되돌아왔다. 이 책을 쓴 사람으로서 나는 그 당시에 썼던 모든 내용을 인정하고 지지한다. 하지만 "희망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던 역사는 이와 다르다. 그 역사 속에서 나는 단지 여러 다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 따름이다. 그 역사 속에서 나는 책을 쓴 사람이기보다는 오히려 그 처음으로 읽은 사람이다. 이 머리말에서 나는 이 신학이 생겨난 역사에 관해 말할 것이며, 그 이후로 이 책이 걸어간 길에 관해 말할 것이다.
"희망의 신학"은 "개신교 신학"(Evangelische Theologie)의 발행인들이 1958년으로부터 1964년까지 전개하였던 논쟁으로부터 생겨났다. 그 당시에 우리는 성서적 근거를 갖는 조직신학에 이르기 위해 게하르트 폰 라트(Gehard von Rad)의 "구약성서 신학"과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신약성서 신학" 간의 논쟁에 참여하였다.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은 역사 이해에 대한 질문이었다. 현실 전체는 인간의 희망을 깨우는 하나님의 약속의 맥락 안에서 "역사"로 경험되는가, 아니면 그 맥락과 대립하는 가운데서 "역사"로 경험되는가? 아니면 역사는 인간 실존의 역사성에 근거하고 있는가? 그 당시의 모임에서 이것은 매우 전문적인 신학 논쟁이었다. 하지만 더 정의롭고 더 평화로우며 더 인간적인 세상에 대한 미래의 전망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전쟁 이후에 풍미하였던 실존주의(實存主義)를 극복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무감정(Apathie)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랐으며, 삶에 힘을 줄 수 있는 희망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에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신화는 알버트 까뮈(Albert Camus)가 매우 감동적으로 소개하였던 시지프스(Sisyphus)의 신화를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압도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와 고기 가마로부터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된 자유의 나라로 들어간 사건은 새롭게 발견된 신학의 주제가 되었다.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창조적인 기대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은 다시금 자신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에 내가 논쟁을 위해 썼던 것은 처음에는 단지 제한된 신학 논문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희망의 신학"에서 나는 다양하고 느슨한 신학의 재료들을 서로 엮어서 신학 전반을 위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여기서 사용된 신학의 재료들은 구약성서의 약속의 신학,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Parusie)의 신학, 홀랜드의 사도직의 신학, 이 세계를 서서히 변혁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드러내려는 혁명적인 윤리였다. 1967년에 잡지 "슈피겔"(Der Speigel)은 "그리스도인의 창백한 피 속에 철분을 공급하는 것"(Eisen ins bleiche Christenblut)이야말로 "희망의 신학"의 의도라고 썼다.
나는 (이른바) 신(新)맑스주의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메시아적인 철학에서 이처럼 미래를 지향하는 신학을 위한 가장 중요한 철학적 범주들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의 "희망의 원리"(1958/59)의 초판을 구입하였으며, 1960년에 스위스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이를 읽었다. 나는 이 책에 너무나 매료되었기 때문에 - 내 아내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 스위스 산의 경관을 감상할 틈도 갖지 못하였다. 나의 첫 인상(印象)은 다음과 같았다. 왜 그리스도교 신학은 희망을 내팽개쳤는가? 하지만 희망은 원래,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가장 고유한 주제가 아닌가? 하지만 그 다음에 나는 자기비판적인 질문을 던졌다. 원시 그리스도교의 생생한 희망의 영은 오늘 어디에 남아 있는가? 나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모방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그 당시에 바젤(Basel)에 있던 칼 바르트(Karl Barth)가 의심한 것처럼 나는 "희망의 원리"에 "세례를 베풀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전제들 위에서 그에 필적하는 신학을 전개하고 싶었다. 그 당시에 장-폴 싸르트르(Jean-Paul Sartre)가 무신론을 인간의 자유의 유일한 토대로 삼았듯이, 블로흐도 무신론이야말로 역사 속에서 활동적인 희망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나는 탈출과 희망의 하나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부활의 영이신 하나님이야말로 역사 속에서 활동하고 고난에 저항하는 희망, 메시아 사상과 묵시사상의 근거와 동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미신과 우상숭배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려는 무신론과 외적, 내적인 감옥으로부터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자유로 인간을 해방하려는 메시아 사상, 이 두 가지 운동은 적이 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서로 협력할 수도 있다. 블로흐의 말대로 "초월(超越)이 없이" 역사적으로 미래를 향해 초월하든지, 아니면 내가 주장하였듯이 "초월과 함께" 그러하든지, 우리는 그 결과를 우리를 기다리는 그 미래에 담담히 맡길 수 있다.
비록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1964년에 "희망의 신학"은 분명히 결정적인 때(Kairos)를 맞이하였다. 이 주제는 말하자면 "유행을 타기" 시작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현대 세계의 문제들을 향해 문호를 개방하였다.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민권운동(Civil-Right-Movement)이 절정에 달했다. 동유럽에서 우리는 프라하(Prag)의 사람들이 "인간의 얼굴을 지닌 사회주의"라고 일컬었던 맑스주의의 개혁운동이 생겨난 것을 보았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성공한 쿠바(Kuba) 혁명이 곳곳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성인들의 희망을 일으켰다. 서독에서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나은 사회 정의를 향한 의지와 "핵무기에 대한 투쟁"을 통해 "더 이상의 실험은 없다!"라는 구호 속에서 침체되어가던 전후(戰後) 시기의 상황을 극복하였다. 1960년대는 실로 미래를 향한 출발과 전향의 시대였으며, 희망을 통해 거듭난 시대였다. 다른 한편으로 1967년에 "희망의 신학"이 미국에 출간되었을 때,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은 희망의 신학 때문에 기반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1960년대는 앞에서 말한 희망들이 쓴 환멸을 맛보면서 끝을 맺었다. 1968년에 바르샤바 조약 군대의 탱크가 프라하의 "인간의 얼굴을 지닌 사회주의"를 짓밟아 버렸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을 비극적인 갈등 속으로 몰아넣었다. 1968년에는 교서 "Humanae vitae"(인간의 생명)가 발표되었으며, 이 교서는 오늘의 세계를 향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개방성을 끝장내었다. 같은 해에 웁살라(Uppsala)에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는 주제 아래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총회에서는 교회일치의 희망이 절정에 달하였지만, 그 이후로 복음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과 갈등을 겪기 시작하였다. 1972년의 경제 위기(석유 위기)를 통해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의 땅"에서 살고 있지 않고 미래도 무한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땅과 제한된 자원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은 이 땅의 생명을 파괴하는 현실에 대한 활발한 저항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 당시에 매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위대한 희망은 작고 제한된 많은 활동들, 즉 환경 운동, 평화 운동, 여성 운동과 다른 운동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를 "구체적인 유토피아"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환경 파괴, 대량살상의 수단들과 여성 억압에 대한 저항은 유토피아적인 동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내적인 필연성의 느낌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리고 1968년의 환멸 이후로 정확히 20년이 지난 1989년 이래로 우리는 너무나 오래 동안 절망적으로 생각하던 정치의 무대에서 그 누구도 진지하게 기대하지 않았던 "표적과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졌을 때,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의 체제가 우려하던 대대적인 피흘림이 없이 평화롭게 사라졌을 때, 역사는 우리의 작은 믿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거대한 폭력의 체제들에 대항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이며 때로는 매우 흥겨웠던 1980년 말엽과 1990년 초엽의 이런 혁명들은 "희망의 신학"의 강력한 후원군(後援軍)이었다고 생각된다. 왜 우리는 더 위대한 희망을 품지 않았는가?
"희망의 신학"이 다른 나라에 끼친 영향은 개인적으로 나의 모든 직접적인 영향을 넘어선다. 오히려 "희망"은 제3세계의 나라들로부터 새롭고 매력적인 형태로 내게 되돌아왔으며, 그 이후의 나의 신학 작업에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제임스 콘(James Cone)의 "흑인신학", 구스타보 구티에레츠(Gustavo Guti rrez)와 혼 소브리노(Jon Sobrino)의 "해방신학", 한국의 서남동과 안병무의 "민중신학"이다. "행동하는 희망"은 많은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상황(Kontext) 속으로 옮겨졌다. 왜냐하면 희망은 항상 오직 상황 속에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적 회상과 약속의 본문(Text)은 어디서나 동일하다. 앞에서 말한 영역에서 "희망의 신학"이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해방과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일관된 전망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연철학과 자연과학과 관련성을 맺는 창조론은 "희망의 신학"이 새로운 신학적 구조물을 세웠던 영역은 아니었다. 인간 실존의 실존주의적 역사성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그 당시에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내용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관점에서 본 세계의 역사였으며, 지구 생태계와 인간의 몸의 구조는 아니었다. 이런 영역은 1960년대에 "떼이야르"(Teilhard)의 추종자들과 과정신학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1972년 이후부터 비로소 지구 생태계의 위기는 나의 의식 속으로 들어왔으며, 나는 강의와 세미나 중에 "희망의 신학"으로부터 새로운 창조론을 전개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 작업은 내가 삼위일체론과 더 넓은 미지의 분야인 성령론을 발견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985년의 기포드 강연(Gifford-Lecture)과 1985년의 책 "창조 세계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나는 희망의 신학을 지구, 몸과 감각 세계로 넓혀나갈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나는 생태학적 논의와 여성신학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희망의 신학"과 함께 나는 나의 최초의 신학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곧 신학의 전체를 하나의 유일한 초점(焦點)에 맞추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이 초점은 희망이었다. 1972년에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다시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었다. 만약 우리가 신학을 이처럼 하나의 유일한 관점에 모으고 그 모든 영역들을 이 관점으로부터 해명한다면, 새로운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이로써 우리는 당연히 일방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일방성"은 또한 나의 종전의 책들을 향한 가장 흔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나를 존중하는 비판이었다. 왜냐하면 중요하고 열렬한 논쟁 가운데서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만약 그가 그 어떤 결론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항상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논쟁적인 사람이 되며, 지금까지 간과된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다른 견해와 대립되는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 자신의 전체는 더 큰, 그리고 계속되는 담론(談論)의 한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절대화하지 않으며, 계속된 논의를 위해 자신의 제안을 내어놓는다. 모든 현세적, 역사적 신학은 거대한 신학 담론에 참여하며, 일방적이다. 아마도 천상의 신학자들의 합창에서는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보편성"과 일반적인 "조화의 상태"는 결국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학의 속성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 이 땅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나님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리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위한 열정을 갖는 하나님 인식이다. 사람은 늙어갈수록, 그리고 자신을 점점 더 비판할수록 젊은 시절의 급진성(Radikalimus)을 더 많이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쉴러(Schiller)의 연극 "돈 카를로스"(Don Carlos)에서 마르크비스 포자(Marquis Posa)는 "젊은 시절의 꿈을 멸시하지 말아라"고 말한다. 이 머리말을 쓰는 동안, 나는 다시금 33년 전의 "희망의 신학"의 비전(Vision)과 완전히 하나가 됨을 느낀다.
1997년 5월 29일 튀빙엔에서 위르겐 몰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