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문명: 기독교학회 참관기

이신건

 

우리 시대의 화두는 압도적으로 "21세기"다. 여기저기서 미래를 예견하고 이를 위해 준비하려는 몸짓이 부산하다. 교회와 신학이라고 어찌 예외일 것인가? 2,000천년을 두 해 앞둔 올해는 부쩍 미래에 관한 책들이 서점의 전면을 차지한다. 연동교회의 이성희 목사의 "미래목회대예언"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가 하면, "미래"라는 말을 사용해야 유식하고 장사도 잘 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신학도 다가올 다가오는 미래의 태풍 앞에서 기상도를 작성하느라 부산하다.

<신학사상> 102집(1998/가을)은 "새로운 제3밀레니엄 시대와 한국 교회와 신학"라는 특집을 올리고 있다. 이 중에서 김이곤 교수님(한신대)의 논문 "21세기 패러다임의 변화와 신학하기"가 유독 나의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김 교수님은 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다음과 같이 전망한다: 1. 구원/해방적 역사신학으로부터 관용/화해지향적 창조신학(생명신학)으로의 전환, 2. 기독론적 신학으로부터 신론적 신학으로의 전환, 3. 신학의 특수성 강조로부터 신학의 보편성 강조로의 전환. 그리고 김 교수님은 한국교회가 이것을 수용할 자세를 갖추고 있지 않음을 나무란다. 새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서구 신학에 대한 사대주의적 독선, 교리주의적 독선을 회개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런 분석은 대체로 미래를 전망하는 사람들의 논지와 비슷하다. 그런데 흔히 전망과 기대는 서로 섞이기 쉽다. 그래도 기대는 미래를 강력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미래는 모든 인류에게 비슷한 모습으로 다가올 것 같지만, 각 민족은 자신의 정체성에 강하게 집착한다. 그래서 우리의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라는 역설도 나오는 것 같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떻게 다가올 것이며, 그 속에서 한국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신학적 과제는 무엇일까? 98년 10월 16-17일 이틀 동안 유성의 '아드리아' 호텔에서 개최된 <한국기독교학회>는 이런 고민을 나눈다기에 가 보았다. 주제는 "성령과 제3천년대를 향한 새로운 문명 창조"였다. 꽤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였기에 앉을 자리가 부족하였던 것이 유감이었다. 예년처럼 준비 과정에서 손발이 잘 안 맞았던 것 같다. 그래도 성황을 이룬 것은 다행이었다. 성결교회 소속 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 이색적이었다. 다른 학교의 경우, 강사급 학자들이 거의 오지 않았지만, 유독 서울신대 출신 강사들은 눈에 많이 띄었다. 최근에 학자가 많이 배출된 탓도 있겠지만, 강사도 의젓한 학자로 인정받는 우리의 풍토가 자랑스러웠다고 할까?

"성령"과 "문명", 이 두 주제는 서로 잘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두 주제가 나란히 나온 경우가 거의 드물었다.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문화는 인간의 작업이기 때문일까? 여하튼 미래의 패러다임은 "문화"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신학도 차츰 문화에 더 큰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그리고 현대 신학은 점차 "성령"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콕스와 몰트만 등). 누구의 제안인지는 잘 몰라도, 이 두 주제를 함께 연결한 것은 보수적인 냄새보다는 다소 독특하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

전체 모임에서 주제발제를 하신 분은 김광식 교수님(연세대)과 맹용길 교수님(장로회신대) 두 분이었다. 제3천년대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문명을 논하는 자리에서 중진 교수님만이 발제를 한 것은 다소간 예외였다. 그분들의 역량을 결코 과소평가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고 논의하는 일에는 젊은이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젊은 신학자 하나를 섞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왜 미래를 논의하는 이 마당에조차 젊은 학자들이 끼지 못하는 걸까?

이런 아쉬움보다 중요한 것은 발제 내용이다. 김 교수는 평소처럼 토착화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교회사와 교리사를 토착화의 관점에서 보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분의 발제 요지를 요약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기독교의 영성은 교회사에서 지역적으로, 양식적으로 이동하였다. 왜냐하면 복음의 토착화의 역사인 교회사는 성령의 활동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동방 정교회는 7차례 공의회를 개최, 주도함으로써, 기독교의 교리와 제도를 확립하였다. 여기서는 헬라주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다음에 촛대는 서방교회로 옮겨졌다. 이로써 토착화의 모델이 바뀌었다. 교부들은 복음을 주로 로마법의 바탕 위에서 토착화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형이상학적인 교리보다는 구원의 확실성에 관한 구원론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로마 천주교의 간접적 영성 체험과는 달리 직접적 영성 체험을 추구함으로써, 구원론에서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종교개혁적 전통은 동아시의 개신교에까지 연장되고 발전되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문화적 토대는 유-불-선이다. 유-불-선은 동아시아의 문화적인 원형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교회는 네 번째로 하나님의 촛대를 이어받은 전적으로 새로운 교회다. 한국교회가 유-불-선의 바탕 위에서 토착화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이다. 물론 영이라고 다 믿지 말고 영을 구별해야 한다. 여기서 비로소 문명 창조의 가능성이 살짝 드러난다. 이것은 믿는 자의 숙명이요 과제다."

전반적으로 나는 김 교수님의 논지에 반대할 논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적 바탕이 유-불-선이고 이 바탕 위에서 한국 교회의 영성이 결정적으로 형성되었다는 논지도 타당하다. 하지만 비록 기독교의 역사가 서양에 비해 일천하다고 하더라도,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나아가 다른 나라에 이를 전파할 정도로 강력한 한국적 영성과 신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는 불분명하다. 지금 외국에 소개할 만한 우리의 신학은 '민중신학" 정도가 고작이다. 물론 윤성범의 "성(誠)의 신학"과 유동식의 "풍류신학" 등도 없지 않지만, 한국인의 대중교인들의 심성에 뿌리내리기는 너무 까마득한 것 같다. 이 신학이 참으로 한국적인 것이라면, 벌써 우리의 언어와 고백으로 용해되었어야 한다. 아니 최소한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쉽게 설명되었어야 한다. 대중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신학은 결국 현실과 유리된 사변이 아닐까?

그런데 한국적 토착화 신학의 과제를 김 교수님은 이것을 여전히 미래의 숙제로 돌린다. 자신의 세대가 이 숙제를 다 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듯이. 하지만 유-불-선에 익숙한 옛 세대가 이 바탕 위에서 한국교회의 신학을 주도하지 못했다면, 전통으로부터 점점 멀어져만 가는 미래의 세대가 어찌 이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미래 사회에도 여전히 유-불-선이 한국인의 불가항력적인 조건이 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다가올 미래의 문명이 더 우리를 전율케 하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 동서양을 막론하고 엄청난 미래의 충격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는가? 지금 성령이 우리의 과거로부터 불어오는 게 아니라 미래로부터 더 강력하게 불어오고 있다면, 김 교수님은 왜 미래의 충격 속에서 우리에게 임재하는 성령의 활동에는 무관심하고, 여전히 과거에만 연연하는가? 왜 미래의 문화적 패러다임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만약 그분이 젊은 분이 아니기에 그렇다고 한다면, 앞에서 토로한 나의 아쉬움은 더욱 더 커진다.

맹 교수님의 발제는 상대적으로 미래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분의 발제의 요지는 이렇다: "성령은 문명 창조를 주도한다. 성령은 인류 복지를 위한 문명을 창조케 한다. 성령은 문명 창조의 통합적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새로운 천년대를 형성하는 신문명은 통합 문명, 가치존중의 문명, 도덕성의 문명, 정신 혹은 신앙 문명, 생명 문명, 공동체 문명이다. 우리는 2천년대의 변화를 예측하면서, 지탱-지속가능한 사회와 문명의 방향을 바라보면서 신문명 창조를 추구해야 한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문명 창조의 모형이다."

그런데 미래 문명에 대한 맹 교수님의 분석은 이론적 논증보다는 신앙적 희망에 더 비중을 두는 것 같다. 그래서 그분은 "기도"로 글을 맺는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 살롬의 생명 문명인 신문명을 창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김 교수님이 성령의 활동을 인간의 문화적 바탕과 연결시키려 한다면, 맹 교수님의 성령론은 어디까지나 정통교회의 삼위일체론에 근거해 있다. 김 교수님의 논지가 성령의 자유를 위해 자칫 혼합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면, 맹 교수님의 논지는 정통의 수호를 위해 자칫 성령의 역사성을 간과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여하튼 김 교수님은 여전히 성령의 토착화 활동에, 맹 교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생명, 공동체 등)에 더 기대를 거는 것 같다. 서로 다른 이 두 관점도 곧 자유로운 성령의 역사일까? 여하튼 "미래"와 "성령"은 중요한 신학의 화두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의 자유함과 "미래"의 불확정성은 우리를 참으로 들뜨게 한다.